요즘 티비 프로그램 중에서
요즘 티비 프로그램 중에서 인사이트 다큐멘타리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라는 프로그램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 젊은 사람들 중에서 오대양에 관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그것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테넷 같다. 영화를 보았는데, 여자 주인공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은 오대양이 종교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영국의 유명한 문예평론가 에프알 리비스를 닮았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그와 같은 소리가 입에서 쏙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그래서 영화 테넷이 그렇게 전개도 아닌, 안 전개도 아닌, 상태로 질주하였고, 나중에는 여성정의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형사가 아니면, 글을 쓸 수 없고, 한글을 모르면 글을 쓸 수 없으며, 비판적 이념의 기본적인 소양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전혀 없을 것이고, 잔인한 것을 몰라도 입도 벙긋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과 학생들이 인절미를 맛있게 먹고, 세상으로 가, 사람들이 거의 가루와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냉혹한 민족주의적 현실을 몰라도, 아무런 글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에프알 리비스의 글을 알지도 못하고, 영어로 읽지도 못한다면, 기가 죽어서, 우리의 기가 죽어서, 도리어 죽은 박순자가 살 수도 있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고발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구도에 있어서, 스스로 악한 것의 현상과 증거가 되고자 노력한 여자 에프알 리비스의 핏빛 종교화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그와 같은 노력과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라면, 비좁은 구멍을 통해서 전달되는 문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르뽀, 아름다운 여자를 향해 르뽀하지, 함부로 뽀뽀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드라마의 성공은 감동의 정확성에 있다. 감동이 우유부단하고, 아주 적게 사람이나 죽이고, 거기에 물리적인 궤도만을 설치한다고 해서, 사랑, 결혼, 그와 같은 트램을 만든다고 해서, 사회와 도시가 발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사회를 고발하고, 사랑을 꽃 피우며, 우리 작은 사회와 역사를 좀더 논리적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드라마의 목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면,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화 테넷을 보면, 그것이 자기도 목표인데, 잘 되지 않는다는 감독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갖은 수단을 써보아도, 차원을 달리하고, 시간을 돌려보아도,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는데, 그 정도로 노력하면, 몇 위 수상은 못하더라도, 노력상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노력상은 옛날 티비이다. 몇 위 수상은 상금과 상패, 그리고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이었으나, 노력상은 제일 좋은 티비를 선물받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노력상을 받을 수 없다. 노력상의 모순이 그것이다. 상은 받고 싶은데, 노력은 하기 싫은 예술가의 성격을, 드러내고,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대양 사건의 개요를 읽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는가 가장 먼저 놀라게 된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자. 다만 공부를 못하거나, 일을 못할 뿐이지, 다들 적당한 커먼 센스를 갖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우먼 센스? 그들은 요한 세바스찬 바하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이 대륙적인, 그리고 프리드리히 헤겔적인 관련을 어떻게 맺어서, 유럽을 압박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테넷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지만, 아는 것과 같은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아는 것이 힘이면, 힘이 없는 사람과, 힘이 있는 사람의 연대 같은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수륙양용,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과연 그와 같은 일취월장과 같은 풍경이 가능할 것인가? 오대양을 보면, 그와 같은 연합이 가능하다는 매우 다른 수학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러니 그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서, 취조를 하다가, 한 대도 때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뭐 특별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식 사회주의라는 것이 늘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 자체가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식 사회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유럽의 역사 자체가 붕뜬 것 같은, 화장이나, 빵이나, 붕어빵이나, 학문적 관심이, 그런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도 노력하고, 저렇게도 책을 내고,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음악이, 다만 하나의 주제를 선보이지 않고, 매번, 매초마다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들에서부터 벗어나고, 그 모든 것들과 하나되어보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주제가 단정하게 전개되면, 그것은 분명 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학생들이 글을 쓰려고 하면,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영어는 단정하고, 분명하며, 그릇이 확립되어 있고, 우리는 은는이가부터 불분명하고, 항상 은을 붙이고, 항상 다른 어미를 붙이고, 말을 길게 하다가, 맞는 동사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유럽을 택해서, 유럽과 연합하였다면, 우리는 곤욕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티비를 보다 보면, 티비에서 보이는 아나운서와 기자들이, 얼굴이 뻣뻣한 것이, 바른 말을 하려고, 항상 긴장해 있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보다 조금 느린 템포이지만, 도리어 신뢰가 가고, 우리 한국어도 저렇게 적당한 상자에 잘 담기는구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국이나, 영국, 뉴스들을 보면, 드디어, 그것들이 도리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유럽을 사랑하였고, 같은 문법의 운명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였지만, 의심이 많고, 종교적 희생이 많고, 그래서 서로를 불신하는 조건과 차원에서는, 바하의 음악은 일초를 동조하였으나, 이초에서 그에게 칼을 심는 조증의 성격으로 밖에 낙찰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그들이 늘 자주 어울리고, 밤낮으로 자주 어울리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과시의 덕목이고, 심리전의 항목이다. 그래서 종교적 희생, 경제적 희생, 학문적 희생의 세계 연합에서는, 항상 포섭이 되는 것이 가난한 정신의 아시아인들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박순자는 한국 땅에서 공부하지 않았던 것일까? 민중들의 편에 서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솔리데러티가 생각보다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그와 같은 거울을 통해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간첩은 공부할 수 없다. 한국어도 잘할 수가 없다. 만일 낮은 사탄의 지배에 철저히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들의 죽음이 일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랑을 권하지만, 사랑도 아니고, 민중을 권하지만, 민중도 아니며, 공장을 권하지만, 프로그램의 보도에서처럼, 공장의 생산도 아닌 것이다. 경제를 알지만, 단순한 경제적 관심을 잘 알 뿐이고, 어떤 서류 같은 것, 경찰에 대해서는 두려움 때문에 지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탄은 목숨이 여러 개이고, 그래서 간첩의 활동이 불리해지면, 얼른 그 지역을 이탈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이탈하나, 사탄의 영원한 간첩들은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이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연대적인 함몰이, 습관적이고, 단순하며, 처음에는 삼십년이 걸리는 내용들이, 나중에는 단 한 달에도 시작되고 마감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라는 것도, 우리의 인간의 역사가, 과거에 셀 수 없을 시간으로 깊었고, 우리 인류의 숫자도,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의 내용이, 처음과 끝이 있고,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 오대양 사건이 우리들의 높이가 되어, 언제든 우리에게 시체 지붕처럼 덮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소설이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죽음이 생활의 죽음이고, 생활의 모습이 바로 소설의 한 장면인 것이다. 그것이 구분되어 보이는 것은 방법이고, 다만 더 큰 내용을 꿈꾸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일 뿐인 것이다. 철학은 영국에서 먼저 유행이 깊었고, 그것을 독일이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로크나 버클리 흄이라는 것처럼, 나중에는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에게 밀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논리적인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대양의 지붕보다 높은 것은 영국에서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년의 날을 사는데, 그것이 오대양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확신하겠는가? 박순자는 그것을 고발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알지 못했어도, 기독교의 현상을 다양하게 경험하지 못했어도, 그 사실을,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에, 세상 모든 공부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일 수 있다. 영화 테넷에 그와 같은,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그것이 뭔가 싶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오래 살지 못하니, 부자들은 똥파리들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젊어서,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그 사실을 모르고, 나이가 들어 그와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지내니, 도리어 박순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한국 사람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