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의 한 빛
동원의 한 빛
우리는 동원된다. 남원도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원되고, 우리는 교육과 사회, 어떤 콘서트 같은 것에도 동원된다. 자발적으로 거기에 나가는 것은, 동원되었던 것을 씻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직관이 없고, 콘서트 직관 같은 것은 있다. 우리는 어떤 애쓴스, 그런 애쓰는 것은 없고, 다만 본질이나 자질, 그리고 본방 사수 같은 것은 있다. 우리는 그렇게, 본방 사수나, 그런 것만 잘해도, 문화가 발전할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라고 해도, 전진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후퇴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이나, 양심의 가책, 어떤 그런 것들이 없기도 했었다. 전진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프로그래시브 락 같은 것, 우리가 락이 걸렸다고 하는 것, 라큰롤, 그런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진이라는 것, 티비가 다음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재방송을 선택하게 하고, 티비를 계속 보여주는 것. 티비를 계속 문제 풀기하고, 때로는 야구도 하는 것. 우리는 그런, 다른 참치 회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동원 참치까지 오고야 만 것이다. 동원 고래는 어떻게 해도, 상상할 수가 없다. 돌고래 떼죽음 같은 것은.
과연 철학적 직관 같은 것은, 고등한 사법 체계, 그들의 문화, 프로그래시브 락 같은 것에 비하면, 문제가 있는 것인가? 조금은 덜 떨어진 것인가? 우리는 서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과학과 싸우고 있고, 내가 그것을 지적하면, 무너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지적하지 않으면, 사탄의 과학에 직관 이전 상태나마 사탄으로부터 결계가 있는 민족으로서, 버티는 이도 있고, 버티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포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체세포를 가진 경우도 있고, 사탄이 그런 체세포를 가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육고등학교나, 체육대학교, 그런 고등한 체세포는 그다지 도덕적이거나, 사탄적인, 조작적인 티비 프로그램 같은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 그래도 사탄이 자기들의 체세포랍시고, 죽은 이의 부츠를 신는다 하면, 우리는 사뭇 가슴이 아프고, 권징, 가슴에 창이 박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관의 나라, 콘서트 직관이 아니라, 철학적 직관의 나라에서, 우영우 드라마가 서방 세계의 변호사가 된다고 하면, 펭수 찾고, 우리로서는 한길 찾고, 한울 찾고, 범우 찾고, 해야할 판에, 사람들이 읽은 적도 없는, 펭귄 문고를 찾고, 가본 적도 없는 에일리를 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우영우가, 서방의 비스마르크, 어떤 비슷한 것, 그리고 마르크화, 사법 제도에 의지해서, 우리들의 천연적이고, 자라면서 능동적인, 생각의 공동체적 주관에 도전한다는 것은, 펭수 찾고, 어쩌면 작품의 개성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사탄이라면
고래로 사람들을 모으고
내가 들어오는 것에 대비해
참치로 빠져나갈 구멍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이라면
습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