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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서운 불교적 분위기

마음대로다 2024. 12. 13. 21:54

슬프고 무서운 불교적 분위기

 

 

 

 

 

 

 

 

 

 

 

 

 

 

 

나는 결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수록, 지는, 그리고 손해를 보는 지경이라는 것을, 다만 상상만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한국어 능력은 마침내 불교를 획득하고, 대신에 그와 같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도대체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로까지 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강남 성모 병원에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다른 생각의 여지나, 다른 해남 땅끝 마을은 없는 것일까? 우리들은 반드시 사탄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안 알면 안 되는 것일까? 안 알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어째서 윤평중은, 윤석열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초강수를 보면서, 초고도 비만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악을 지르게 되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국힘 같은 것일 것이다.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수 많은 악들이 이미 산재해 있는데, 윤석열의 셰익스피어적인 연기가, 서울의 봄을 따라 하는..........

 

말잇못.....

 

아무튼 무슨 잘못이고, 무슨 그런 거대한 죄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런저런 벌거벗은 시리즈.

 

세계사와 한국사는 성경의 다니엘서를 향한 지옥행 급행열차 같은 것인지 진정,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 그와 같은 것인지.....

 

*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마스크처럼, 교회에서 누군가 복음성가를 다만 피아노로 연습하거나, 혼자 자기 들으라고 연주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일 수 있다. 그와 같은 딕테이로쉽. 그런데 교회에서 교회 음악이 아니라,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클래식 소품들을,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연주한다고 쳐보자. 그리고 그는 젊은 여자고, 클래식 연주자이기는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헬쓰도 다닌다고 쳐보자. 그와 같은 가정과 피아노를 쳐보자. 우리는 피아노가 그만, 아무런 기독교 비기독교를 가리지 않고 진행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 복음성가, 그리고 그것과 매우 비슷한 봄처녀 섬마을 아이, 그런 한국 가곡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사를 알고 있으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도 따라 그것을 중얼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소품으로 가서는, 마치, 방송국의 소품실처럼,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넓이와 자유를 가지고, 도대체 저 많은 훌륭한 내용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악장, 모든 심포니들의 주제들이, 이전의 가사 있는 멜로디에 비해, 내가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만회하려는, 시크릿 가든, 그런 노력이 있었다. 시크릿 가든은 우리에게 그것을 폭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매우 가사 같다는 것. 그것은 앙드레도 마찬가지이다. 이승환의 노래를 보면, 가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가사로 그와 같은 노래를, 혹은 연주를 하기가 어렵다. 연주만 해도, 우리는 가사가, 그와 같은 음표를 꽉 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음표는 스스로, 독수리의 발톱처럼, 자기 스스로를 꽉 쥐고 있을 때가 있다. 우리는 못 쥐지만, 피아니스트들은, 진정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 앞에서, 사탄의 독수리 발톱 꽉 쥐는 재주를 과시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이 툭하면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한글 키보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한글 키보드는, 그런 세상 피아니스트들에게, 리스트의 위로를 선사한다. 그것을 선사한다. 그리고 사랑의 꿈을 자아낸다. 리스트는 실제로 독수리처럼 생겼고, 라 캄파넬라, 어딘지 모르게 순천에서 폭행을 할 것만 같고, 곽빈도 같고, 한국에서 계엄령도 선포할 것 같고 그렇다. 가디너가 되어서, 스트리트 파이터와 함께 디너쇼에도 참석할 것 같고 그렇다. 바하 음악을 연주하는. 그 숱한, 기독교 가사만 아니면, 아무런 내용도 없고, 베토벤이 그나마 그와 같은 처지에, 민중신학을 덧붙인 것 같은, 음악 사상사. 그것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의도는 아닌 것처럼, 영겁회귀하는 것이지, 절대정신으로서의 자유, 그것의 자기실현으로서의 역사는 결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시크릿 가든이 가사를 붙일 때마다, 사람들이 붙일 때마다, 우리는 비티에스, 큰 충격을 받는다. 나의 강력한 신, 그리고 현재로서의 현, 그리고 대위법적인 균의 진행에 결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숱한 클래식 방송국 소품들이, 정신병을 앓다가, 정명숙처럼, 우리가 잘 아는, 한국어의 대위법적인 균에 다다르게 되면, 이 지구상에는 그것말고는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진정, 얼터너티브 락 같다. 서양 철학은 한국어의 대위법적인 균을 위해 봉사하는, 교보하는, 문고 같은 것인지, 아니면 대산재단, 아니면 슬프고 무서운 불교적 분위기의 실재를, 과정과 실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서로 묻고, 때로는 큐알 코드를 갖고, 큐엔에이 시간을 갖고 해야 할 것이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인가, 동방의 이민족이 침입하여서, 소와 닭까지도 모두 죽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은지원이 닭까지요? 그것을 물었던 것 같다.

 

가르치던 것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만큼 잔혹했다는 것이다. 대체 서양의 소품들은, 방송국 소품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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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기독교적 고난의 필수를 문화로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일제의 한국 침략이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양의 똑똑한 유대인들을, 개화한 한국 사람들이 데려가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렇게 일하게 하려고 한다고도 생각했다.

 

사탄은 전쟁터에 여자들과 어린이까지도 보내고 싶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불구덩이에 넣고 모두 죽였던 것 같다. 초기 중국도, 분서갱유라는 말이, 사탄의 정신과 전쟁의 레퍼토리가 아니면, 사실 무슨 의미인지 알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일단 죽여놓고, 태워놓고, 나중에 다시 살리고자 하는, 이상한 과대망상도 진실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차대전 이후에, 철학적 현대성이 급격히 쇠락해진다. 내가 붓글씨를 연습하면서, 시크릿 가든을 듣고자 하면, 그래서 그들이 뒤늦게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다지 대단한 계엄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