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셰익스피어와 한국 사람
마음대로다
2025. 3. 20. 08:32
셰익스피어와 한국 사람
우리가 아들과 딸들을 국문학과를 보낼 때, 일종의 통합 문학과, 특정 국가 문학과로 보낸다는 것은, 이제는 많이 의미가 없어지다 보니까, 성경학과라고 한다면, 히브리나 헬라, 그렇게 학과를 만든다는 것이 애초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문학과로 보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학교 축소, 선생 축소, 아이들 인구수 감소와 연동하는 것이 있다 하겠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단순한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었고, 하나님은 신축성하시니, 그런 가사가 들려서, 무슨 말인지 물으니까, 누군가 시온성을 그렇게 잘못 적었는데, 나중에는 그렇게도 부르고, 이렇게도 부르다가, 그냥 신축성으로 부르는 것이 되었다고 하니까,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자기 볼을 잡아당기기도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말의 고통스러움. 모든 것이 말이 되는 것의 고통스러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일 것인. 하나님은 신축성하시니. 일종의 비트겐슈타인스러운.
아이들이 문학과에 들어가서, 국문학과에 들어가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도대체 누가 비평가가 되느냐는 것이다. 철학과에 들어가서, 인간이 어째서 시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느냐, 시험지를 찢었다는 학생이 있다고 하는데, 일종의 하나님은 신축성하시니, 그런 바리새인이 헐거운 옷감을 찢는 풍속을, 한일의 유도복이라고 하면 찢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찢기는 가슴 안고 살아왔다, 이땅에, 피울음 있다, 겨우 종이나 찢으면서, 세계관적인 찢음을, 만찢남을 연출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데, 아무개는 여자의 치마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는데, 같은 맥락이라면, 사람이 너무 성기기에 사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학생들은, 부모님이 적극 지원하여서, 훌륭하게 문학성에 입학하였으나, 가장 크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철학과 학생들이 철학 일반에 대해 느끼는 막연함, 남의 나라 말 같은 것들의 계속되는 진행, 과학과 현실의 사회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말이나 하고 있는 것 같은 자괴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널리, 철학적인 원문과, 유명한 세컨더리들까지, 문장들이 너무나 철학적이다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문학과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들은 창작에서는, 대충 티비 로코물이라든지, 자이로드롭물이라든지, 그런 물들, 바이킹물들, 그리고 오팔팔, 그런 것들이 관계하고 지원하지만, 정작 비평에서는 막히게 되는 것이다. 읽을 수는 얼마든지 있고, 또한 정작 숱한 보고서들은 거짐 다 비평문으로 작성하게 되지만. 그리고 창작에는 아무런 소질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십년 가까이 공부한다고 해도, 비평적인 문장 하나, 아포리즘 하나, 나체적인 어떤 독백 같은 것 하나, 싸우나도 자주 가고, 좋은 음악들로 샤워도, 디제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멋진 표현으로 자주 하고 하지만, 일종의 랩송, 랩탑송, 카페 랩탑송, 송소희, 그렇다고 하지만, 정작 반듯한 문건하나 졸업할 때 제출하지 못하고,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는 것처럼, 낙원에서 추방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헤겔이 사탄이면, 셰익스피어는 사탄이 아닌 것인가?
국문학은 프리덤 같은 것인가?
생리대 같은 것인가?
사탄이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와 같은 특수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분명 공동경비구역인 셈이다.
일종의 디엠제트 세대인 것.
셰익스피어에의 요청은 처음에는, 신약성경적인 감동을 억제하거나, 견제하거나, 신체절단으로 직행하지 않는, 그나마 에라스무스적인 측면의 세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똑같이 되었다.
우리들 남북한만 통일이 되지 않은 것일 뿐, 그들은 이미, 기분상으로는 천년 전에,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