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흥미로운 생각과 영원한 플란다스의 개

마음대로다 2025. 9. 28. 11:32

흥미로운 생각과 영원한 플란다스의 개

 

 

 

 

 

 

 

 

실질적 고민과 상대적 고민, 그리고 정당한 고민과, 고민정, 그런 것들. 나는 참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갔다고 생각했다. 주로 나를 위한 것들. 그러나 어떤 계기로 그런 것들이 그나마 정도 아래의 것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는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조종 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조금씩 고통이 완화되는 시기였다. 다시 이런 고통이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은 옆에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육성재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내 안의 많은 수사관들이 왈가왈부, 왈가닥 무슨 아주머니, 그런 말들이 많았다. 하나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들. 그래서 내 말을 듣지 않는? 한국 사람들, 어떤 특별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똘레랑스가 생길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너무 대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되는 것도 하나 없이, 광주로 다시 내려온 것이, 기쁜 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낙담한 것도 없이 지낸다는 것이, 보통의 한국 청년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지 않나 싶었다. 나는 늘 자고 싶었고, 죽고 싶었고, 죽기는 싫었고, 일하고자 하였으나, 그 어떤 노동의 동기나, 습관, 친구들과의 연락과 연대, 고대, 과기대, 그런 것들이 없어서, 물건 하나 손에 드는 것조차 힘든 것을, 그런 안티 헬라클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 기대가 없었다. 그것은 정기대 같은 것이었다. 죽창으로 아구창에서 똥구멍까지, 왔다갔다, 그렇게 외치면, 우리는 따라 하기도 했다. 제일 재밌었다. 그것은 엔니오의 음악처럼, 숑숑, 숑숑, 효과음 같은 추임새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기대가 많았다. 예술은 어느새 확고한 목표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예술과, 보편 예술의 경지를, 자기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 격차를 줄여가는 삶이라는 것은, 이념이라는 것, 철학적 고전이라는 것, 그것은 굉장히 흥미롭고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마땅한 조용기, 조용필, 그런 어떤 교수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그즈음으로 해서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가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약했다. 영화 찍을 때나,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그리고 사람들의 심부름도 해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까지는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모두 플란다스의 개가 되고 있었다.

 

앉아.

 

기다려.

 

그것의 정신적 압권을 이겨낼 만한 다른 영화는 없고, 독재적일지언정,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그런 작가도 없었다. 사람들은 플란다스의 개라는 일제 만화의 침략을 받았고, 영화는 그것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한석규는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플란다스의 개처럼 죽어서, 그러니까 황량한 길가가 아니라, 그나마 다윗의 장막 같은, 초원 사진관에서, 거기서 죽어서, 누군가 심장을 고문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서울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교수나 하면서, 여자가 세상의 중심이다는 일본어 하다마리 같은 말이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명인들의 죽음은 모두,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죽음인 것이다.

 

만일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누군가 엄청난 안면 파괴의 공을 경험하면, 그것을 동시적으로 감각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있을 수 있다. 낙안읍성 근처에서 맛있는 짬뽕을 먹는데, 갑자기 안 아프던 어금니가 아픈 것이었다. 만일 그와 같은 케이스에서는, 내 안의 어떤 형사는, 장교는, 이전에 아픈 것과, 지금 눈이 노안인 것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심장이 없으면, 당연히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통을 분유하면, 스콜라철학적으로 분유하면, 자다가 심장이 사라진 사람조차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대신에, 나머지, 백 명, 천 명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달, 많게는 일 년 가까이,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게 된다. 항구에서 노안이 생겼다가, 영어 공부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그때 즈음으로 눈이 침침해지더니, 지금까지 그 상태로 있다. 잠시 충전소에서 일하면서, 완화되는 것을 보고, 오호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로 그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감각이 춤을 추는 것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되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광주에서 룰루랄라 슬프게 지내는 것이, 만일 공부하는 연기자처럼, 공부는 좃도 못하는데, 실은, 그럴 수가 없는 일이어서, 뒤늦게 그것을 내게 고지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정말 서울에서 공부 잘한 사람처럼, 고향에서 폼을 잡고 있는 것인지. 너는 가짜가 아닌지. 그런 생각은 그때는 할 수가 없었다. 충전소에서 일하면서, 눈이 다시 좋아지니까, 항구에서 칠 년 일한 것을 사람들이 없는 사실로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또한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감각이 통한다고 보고가 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피살인자가 되던지, 아니면 마침내 살인의 한 길로 가고 만다. 아침에는 살인자가 되고, 저녁에는 피살인자가 되고, 그렇게 어느 하루는 살인자가 되고, 어느 하루는 피살인자가 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감각이 공부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현무해지면, 얼마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 아무런 정기대가 없었다. 죽창으로 왔다갔다. 영화는 그리고 꿈에 불과하다. 작품도 마치 영어공부처럼, 반복적으로 좋은 것을 많이 써야, 그것에 대한 자주권이나 주권이나 케이나인 자주포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비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시집 한 번 쓰면, 이제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엄밀한 말로, 소설이 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작품과 비평적 합일을 해야 한다. 개그맨 윤정수가 마라도나를 닮은 것도 그렇다. 그것은 국문학을, 국문학생들을 형해화시킨다. 정해영시킨다. 그렇게 아시아문화의 전당에서, 형해화되고, 정해영된 것들의 크고 작은 구슬들이, 고무공들이나, 그런 것들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비평가가 되지 않고, 나이가 든 개그 동아리처럼 죽는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뭔가 될 것 같은 쇠뿔, 제주도 쇠소깍 같은 것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젊은 시절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참변을 함께 지켜본 미국 사람들도 긍정하고, 동정하고, 동의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는, 그나마 팔월의 크리스마스로, 때로는 쉬리로, 죽은 적 없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고, 도리어 본격 작품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을 경쟁에서 밀어낸 대상 작품 같은, 참극을, 백악관의 몰락 그런 제목으로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서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제 애니메이션의 한반도 침범은 늘 언제나 양가적이다. 양조위. 여기서는 박 씨이고, 저기서는 이 씨이다. 그리고 어디에서는 최참판댁이다. 조선의 유학이나 유교는, 당연히 유 씨들이 잘할 수밖에 없다. 유씨씨. 유튜브. 다들 유 씨들인 것이다. 영어로 류드라는 말은, 한국 유 씨를 빙자해서, 성적으로 류드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가수 류의 노래를 아름답게 듣고 있으면, 갑자기 영단어 류드로도 넘어갈 같은, 월북을 감행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동양 고전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일 것이다. 불가리아도 그렇고, 체코마저 그러하다.

 

 

 

일본 사람들은 플란다스의 개가 되어 죽었다.

 

지금 일본인들은 옛날 일본인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