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영화의 갈림길: 비평의 날개

마음대로다 2025. 10. 10. 14:21

영화의 갈림길: 비평의 날개

 

 

 

 

 

 

 
 

 

 
 

거의 모든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늘까지 쉬는 것을 예상은 했지만, 직접 경험하니 기분이 묘하다 싶다. 원래 음악이 끝나고 난 뒤, 그런 것이 재밌고, 명절 기간이 끝나고 난 뒤, 그런 햇빛이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기간 내내 흐리고 비만 내리다가, 흐리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삼 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소나기를 만났는데, 무슨 흐린 날씨라고 반드시 비가 내린데 하였더니, 금세 그치고, 삼청 앞에서는 다시 날이 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까지 쉬는 날로 따지면, 명절날 이렇게 맑은 날이 그렇게 그것의 증거 같고, 물적 증거 같고, 우리들 마음 모두의 심증 같고 그렇다. 증심사 같고 그렇다. 하늘이 맑은 것은, 우리들의 증심사이다. 이번 사람들이, 잔혹한 아레스를 보다가, 한국 영화 보스나, 어쩔 수 없다를 보다가 하였을 것이다. 청년들은, 중학생들은. 중학생들은, 중국 학생들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중앙대 학생들은, 중국 대학생이나, 앙대생이거나,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축복 같은 것. 그렇다면 대만은. 거기는 초중고생들은 없고, 대학생들만 있는 것인가? 한성대. 낙성대. 해운대. 할 것 없이 모두.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런 재밌는 상상이, 우리를 늘 흥겹게 하고, 멍청하지만 괴물처럼 똑똑한 것 같은, 꽹가리를 치게 만든다. 중학생 때에 그 소리가 좋아서, 북이며, 장고, 꽹가리며 징을, 그것이 찢어질 때까지 치고 싶었으나 그렇지를 못했다. 그것은 내 마음 공중의 높은, 징이 되었다. 어떤 상징 같은 것.

 

내가 오래도록 지내고 나니, 나에 대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이 당연히, 이 우주에, 유니버스에, 없다고 여겨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로부터 나오면, 그 순간, 적어도 한 시간 내에는, 어린 학생들은 재밌는, 흥겨운, 여운이 있는 가을을 맞이하듯이, 사람들은 세상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매우 사춘기적 소년 소녀 같고, 대학생 같고, 부담스러운 여대생 같고, 한가위의 높은 달 같고, 그렇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부터 나를 보면, 그것을 상상하면, 내일 당장, 사도세자처럼 죽을 것 같고, 씨씨티비가 없을 때, 꺼내주지 않을 것 같고, 가끔 꺼내줄 것 같고, 그럴 것이다. 생각이 없다지만, 생각이 없다 보니, 이 나라도 없어지고, 북한과는 소멸적 통일을 이루는, 북한도 소멸하고, 남한도 소멸해서, 수학 선생이 먹는 것 재밌게 이야기해 주는 시간으로, 함께 소멸하는, 킨더 초컬릿, 평양 만두, 그런 것으로, 주변 나라도 또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항상 생각이 조심스럽고, 어렵고 그렇다. 생각서예는 이름을 너무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한국어 에세이와 쌍벽을 이루는 것 같다. 그것이 용이고, 이것이 호랑이이며, 그것이 호랑이이고, 이것이 용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이름이, 창작자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것 같아, 우리 모두 놀란다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중국어를 쓸 수도 있고, 사탄이 비호하는 일본어를 쓸 수도 있다. 그렇게 오늘도 낙안읍성 드론 일종 연습장에서 오다가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국어를 선택했다고. 그들은 어둠 깊은 곳에서, 노르웨이어도 쓰고, 헬싱키, 멕시코 시티, 그런 말들을 쓰는 이였으나, 나와 함께 삼십 년간 분투하다가, 내 가까이 살면서, 드디어 한국어에 달통하게 되었다고. 누가 김동인을 배우고, 신달자를 연구하겠는가? 박목월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고, 신채호를 쓰겠는가? 다 쓸 수 없다. 아무런 가미가제 특공대를 강력하게 거절하고, 거기서 국가를 선포하고, 기계의 자리가 아니라, 말의 자리에서, 강단과 어떤 교정의 우주, 두부와 안 두부의 컨테이너 항구처럼도 어떻게 보면 보이는, 사선의 햇빛 속에서, 선언하고, 코레아 우라를 외치는 것처럼, 보편적 이념의 인간 국가를 외치면서, 어쩔 수 있겠는가? 일본인이 동경 한 복판에서, 코레아 우라를 외치면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문학의 극치를 그런 부정적인 조건에서 직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외침 같은 것은, 일종의 참기름의 나물 반찬 같은, 무침 같은 것은, 묻히는 것은 아니나, 확실한 영속성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탄은 특별한 외침이 없는데, 사람들이 사탄에게 굴종하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같은 것인 셈이다. 그것은 분명 소리 없는 아우성인 것이다. 사람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내가 소리치고, 화를 내는 오늘의 한국시 시를 쓰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화를 내고 하는 중에, 그런 것이 없는 한라산 백록담 같은, 물이 마른, 때로는 백두산 천지연 같은, 괴물도 살 것 같은, 그와 같은 수량의, 소설을 쓰고 난 뒤, 사람들은 한국어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국문학과의 논문 제목들이 정해졌다. 그것을 누구도 아직 첫 단추도 달지 않은 것뿐이다.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면서, 내 앞뒤의 모든 학생들이, 대만생들이, 중학생들이, 초등학생들이, 고구려 학생들이, 나의 진행에 동의하였다. 내가 여유를 만들어, 드레 가뇽, 그렇게 제스처를 했는데도, 앙드레 가뇽 하는 그런 음악적 분위기. 배움은 깊은 씨발로마를 우리에게 주지만,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배움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앙드레 가뇽의 그런 인사처럼, 깊은 씨발로마를 주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아직도 국문학은 전진하지 않고 있고, 중국과 일본은, 자국어의 낙안읍성적인 피아노 소리를, 맛있는 잡채의 클래식 기타의, 현전을 완벽하게 연구하고 있지 않다. 마모나꾸. 무슨 말인지 모르는.

 

우리의 지능이 사라지면, 세계의 국가와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산과도, 하늘과도, 자연과의 대통합도 이룰 수 있다. 너무나 끔찍한 모습은, 철저히 제거되어 있고, 그것은 나가르주나로 밀봉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런 통일의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선택한 한국 사람들이, 이십대 이후, 분투 중인 내게 붙은 것처럼, 분명 다수인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영어를 넷플릭스처럼 잘 쓰지 못한다. 우리가 한국어를 쓸 때, 우리는 중국의 슬픈 태풍처럼 느끼고, 일본의 슬픈 낮은 울타리 담장만 겨우 넘어간 것처럼 느낀다. 때로는 지진처럼 느낀다. 우리들의 한국어가, 조선시대의 시작의 충격으로, 유럽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끌었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지저스 크라이스트라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사탄에게 일본이라는 나라가, 마치 걸리버스 트래블스의 한 대목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탄은 일본을 대우하겠는가? 삼성 현대 대우 할 때의 그런 리스펙트, 레전드, 레간자, 그런 대우를 하겠는가? 대접을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대게의 경우, 사탄의 관계에 접수를 시키게 된다. 사탄도 전도하는데 너무 시간이 드는 것은 기피하게 되고, 사탄으로 오염된 것들을 주로 택하게 된다. 그리고, 때리고, 약주고, 사병을 주고, 장교를 주고, 여자를 주고, 다 주고, 그리고 때리고, 거의 초주검을 주고, 부활을 시키고, 네버엔딩 스토리, 병원을 주고, 약주고, 병을 주고, 판데믹, 계속 주고, 전쟁을 주고, 약주고, 그렇게 마침내 자기 사람이나, 자기 국가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조선에게,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것은, 유신적인 관점에서는, 박정희, 사탄에게서 벗어났고, 마모나쿠, 그리고 그들과의 전쟁에서 성공회, 영국,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임진년 이후에, 두 나라는 정확히 말하면, 기아 타이거즈가 맞물린 상태가 아닌 것이 된다. 일본이 사탄에게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사탄이 인지될 수 없는 가난의 대륙이 되는 것에서부터, 마모나쿠, 탈출을 해서, 지금의 겉모습이나마 달성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수학적으로 보면, 잘 계산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유튜브 집안의 배달 음식 일 년 내역의 퀴즈와 같다. 백오십이라고 한 사람이 말하자, 나는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천오백. 나는 좋은 중고차 가격인가 했었다. 그런데 퀴즈를 내는 남자의 아내가, 천삼백을 부르자, 딩동댕을 외치는 것이었다. 일본도 백오십. 중국도 백오십. 사탄은 자신이 있다기 보다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육이오 전쟁에서 남한이 승리한 것에서부터, 분위기가 베트남 전쟁처럼, 머나먼 쏭바강처럼, 이상하다 싶었을 것이다. 항상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고, 할리우드 영화들을 감독했을 것이다. 일본의 원자탄을 히로시마라는 장교가 만들고, 나가사키라는 과학자가 만들고, 그랬다라고 밖에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사탄을 이겨본 적이 없다.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 한국에서, 학교 다녀와서, 김치 먹고, 교회 갈 때, 그런 홍어 삼합 상태에서나, 사탄이 눈에 보이고, 그들과 싸우는 철갑의 소나무들을 볼 뿐이었다.

 

일본이 사탄을 이겼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히로시마 같았고

 

나가사키 같았다.

 

그러니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