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누가 신학대학을 가는가?

마음대로다 2025. 10. 12. 09:55

누가 신학대학을 가는가?

 

 

 

 

 

 

 

 

 

 

 

 

 

거짓으로 예배만 드리고, 드래곤, 신학대학에 이병헌 송혜교의 올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음악적 향기가 있다. 슬픈 외국 여자가, 슬픈 성가곡을 부르는 것 같은. 메르세데스 그런 것. 벤츠. 소사. 그런 것. 그렇게라도, 놀이동산의 전경이라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전경에 투신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실로암. 강원도의 대암산. 나는 쉽게 갔다. 예배도 좋아하고, 기도도 좋아하고, 조용한 교회의 전경도 좋아하고, 금희도 좋아하고 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쓰리쿠션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대게의 사람들은, 쓰리쿠션은, 오블리비온, 혹은 국적 상실의 기회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쓰리쿠션은, 내가 쉽게 신학대학에 간 것처럼, 반젤리스, 어이가 없고, 실소가 터져 나오고, 추성훈이 중국에서 알바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만나는 풍경이고, 자탄풍, 오탄풍, 풍력발전기,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문학이 될 수 있고, 공신력 있는, 그런 음습한 국정원 기관의 장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는 쓰리쿠션으로 죽는다. 적들의 사회성 기사는, 준비가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 일종의 나와 관련한 트리거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며, 오랫동안 준비하고, 오랫동안 우리가 여행한 것과 같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그리고 자기들도 불꽃쇼라고 행하게 된다. 우리는, 기자들은, 계양산의 러브버그들처럼, 러브버그처럼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자린고비의 가족들처럼, 나의 얼굴이나 쳐다보게 된다. 그것은 베토벤의 운명이다. 그러니 동남아 국가가 우리보다 늘 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니도 있고, 살레시오도 있고, 말레이시아도 있고 그렇다. 까도남이라는 말처럼, 검은 옷을 벗었는데, 얼굴은 분명 희었는데, 까도남, 몸이 검은 색인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러브버그 같은 한국 기자들, 관훈 클럽, 라이온즈 클럽, 타이거즈 클럽, 그런 것에 있는지, 아니면 까도남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음습한 권력에게 있는지, 아니면 표면적인 동남아인들이, 아무튼 그런 것들에게 있는지, 잘 헤아릴 수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어린 학생들이, 대충 대학 입시만 하게 되면, 직면하게 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 혹은 한 단면이다. 애슐리가 그렇게 가성비가 좋다는데, 어떤 학생이 아침에 커피 한 잔 건빵 몇 개, 점심에 무조건 애슐리, 저녁에 또한 커피 한 잔 건빵 몇 개, 그렇게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공부한다면, 우리는 그의 탁월한 작전 능력과 수행 평가 어떤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런 학생은 실제로 만날 수 없어도,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우리가 거기서 마지막에 케익의 한 단면을 만난다면, 우리는 분명 사막 데저트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혹은 디저트. 이제는 배고픔이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기가 막히는 것에. 금세 배고프게 되는, 영웅적인 식욕을 가진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 의식의 흐름보다 빠른, 배고픔이라고 하겠다.

 

잘하면, 우리는 동남아에서 신학대학에 갈 수도 있다.

 

너무 예배만 드리면, 드래곤, 또한 러브버그와 다를 바 없는, 기자들과 다를 바 없는, 기자 조선, 가자 지구, 그것들과 다를 바 없는, 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러브버그는 때로는 아름다울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기도원에서, 예배당에서, 앉아서, 나무와 함께, 오래된 성경책의 냄새와 함께, 시간을 보내서, 몸에서 그런 하나님의 러브버그 냄새가 난다고 해도, 그것은 반가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러브버그가 되어서, 신성과 인성의 제로 상태가 되어도, 드론처럼, 조종기가 없는데도, 하늘을 날 수가 있다. 그것은 이번에 있었던 샤오미 카의 에피소드처럼. 자세히 보면, 백석 어느 오래된 목사님처럼, 조종기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우리가 잘 모르는 채로, 드론처럼, 교회의 이곳저곳, 이모저모, 고모, 숙모, 큰 아버지, 남동생, 사촌동생, 인척 관계로 흐르는 것이 아닌, 말씀의 생수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인척 관계가 아닌 채로 지냈으면서도, 낙안사키의, 사기의 척부인의 고사처럼, 우리는 인시가 되지 못하고, 다만 인시가 되는,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쑤뿌리까스 같은 것. 빠드레 같은 것. 외국어 같은 것. 우리가 방언을 그렇게, 비행기의 탈출 조각들처럼 뿌렸던 것은, 지금의 시간을 대비했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인이 피리 부는 소리를 내면, 피리를 불면, 그것이 더욱 우리에게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창때의, 한창훈, 우리들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조종기가 없었다. 다만 기독교 한국 대유행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 중에서, 신학대학으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와 같은 무조종기 관행의 심장에, 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도 목사님들이, 인기 축구인들의 골처럼, 골을 넣자, 나도 모르게 골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은, 그것이 그렇게 계산이 되지 않고, 오랫동안 쓰리쿠션을 준비한 국가의 풍경처럼, 오직 그런 이 같이만 되고 말았다. 성경 지식. 신앙 고백. 교회 체험. 공동체 여행. 여름 성경 학교. 공동 식사. 숱한 예배들이 아니라,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 지식을 반도체로 따지고, 묻고, 미국 영화 보고, 동남아 미국 영화를 보고, 지금 트리거 같은 영화를 보고, 은근히 추성, 그 근처의 불교에 투신하고, 홍콩 영화 보고, 그렇게 신학대학에 간 것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은, 다만 생각만으로도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신경숙의 깊은 충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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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버그는 아름답다. 몸에서 헌책 냄새가 나고, 단어장이, 사건 수첩이, 영단어 수첩이, 너무 오랫동안 공부해서, 몸에서 그런 분투의 냄새가 나고, 아는 말이라고는, 논리적이기보다는, 그런 러브버그의 영성적인 말이나 반복해서 한다고 해도, 그렇지 않을 천년의 시간을 우리가 또한 발견하고, 잘 알게 되어서, 매우 반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공부를 잘할 때나, 젊었을 때나, 국기를 게양하면서, 러브버그를 인식할 수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 회사에서 요구하는 러브버그 지식적인 내외적인 것들을 잘 챙겨야 한다. 그리고 경리가 처음에는 못생겼지만, 일 년 내내 함께 회식하다 보면, 마치, 종말의 때에, 둘만 남은 것 같은 환상이 임해서, 예쁘게 되고, 다음 해에는 사람들에게 국수를 먹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를 우리는, 우습지만, 웃을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축복하지 않을 수도 없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와 같은 충청도의 풍경 같은 것이다. 페레그리나치온. 충청북도일 수도 있고, 남도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헌책방 거리가 유명하지만, 서울은 서울에서 시작해서, 서울에서 바로, 헌책방의 거리가 되는, 성숙이 있다. 숙종이 있다. 숙종은 그런 의미에서, 러브버그의 거대 서예가였고, 국민은 한 명 훌륭한 작가, 사상가, 철학적 이론가도 없이, 장독대의 장이 빈, 그런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성 어떤 박람회에서, 예쁜 여자 인형의 얼굴을 어떤 한국 남자가 만진 것처럼......

 

그에 대한 한 러브버그의 반응이

 

징그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