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삼국사기의 무심정과 사기의 짜증적 소멸

마음대로다 2025. 12. 15. 14:10

삼국사기의 무심정과 사기의 짜증적 소멸

 

 

 

 

 

 

 

 
 

 

우리는 언젠가 책 한 권 읽기 원한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하면, 왕에 관한 글을 읽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사기의 기록 패턴에, 별기가 있는데, 별이 되고자 한다면, 별기를 읽으면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담하고, 아리오소하고, 안타까운 것이, 홈런 하나 없는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 없는 아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그럴 수 없고, 어른들이, 아이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아이일 때는 대한통운처럼, 대통령이 되고자 하나,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어른이 된 다음에는, 아이가 되어서 되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삼국사기의 무심정의 하늘을 향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사기의 짜증적 소멸을 피할 수 있겠는가? 삼국의 정상들이 모여, 문무백관들이 모여, 황도와 백도가 모여, 토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옛날, 남산의 풍경들을 보면, 그와 같은 진지한 토론과 관심 같은 것이 엿보인다. 지금은 해체된 창경궁 동물원도 마찬가지이다. 사기의 짜증적 소멸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한 방편불교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나, 장 미셀 자르의 옥시즌처럼, 그것은 자칫하면 큰일이 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너무 알 수 없는 한자어가 많이 나온다. 지천으로 나오고, 발에 걸리고, 말을 타고 고속으로 진행할 수가 없다. 짝두짝 시장 같다. 그런데도, 어떻게 공중으로 진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사기를 읽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사기를 읽다 보면, 자고 있는 사이, 점차로 쏭바강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좋아할 것인가?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어째서 삼국사기가 오지 않고, 사기가 왔느냐고 콤플레인을 걸겠는가? 그것은 진정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중원의 어느 사람 없는 기차역에 내려, 손님맞이 하러 온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사기라고 하면, 반갑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시선이 회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유심조. 모든 것이 김신조 일당이라는, 어쩌면 국부적인 예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의 냉동식품 회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신선조, 그런 말들에 대한 매우 대놓고 말하고 예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은 짜증대로, 증자라는 인명도 고전에 있는 것처럼, 실제하는 것이다. 쫄면을 먹으면서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너무 맛이 단편일률적이기 때문이다. 파스타를 사 먹는 것이 가장 돈이 아깝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처음에, 오이채와 달걀 반쪽과 함께 먹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들 봉산탈춤보다는, 중국 사자춤의 향연을 보는 것 같은 높이를 선사한다.

 

짜증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삼국사기의 무심정을 선망하다가, 도리어 그 아름다운 사기의 정수마저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공부할 때, 너무 왕과 왕비, 공주와 내시, 그런 것들과 함께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의 안회는 마땅한 것이고, 아무런 실질적인 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쿠푸왕의 피라미드처럼, 그와 같은 인간은 돌아보면, 밤하늘의 은하수만큼이나 거대하고, 많았었다. 그래서 사기에는 별기라는 항목이 있는 것이다.

 

후손에게 정신병을 약속하지 않는 왕권이란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백 개의 단지를 가져다 놓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늘 언제나, 왕권의, 그런 것들, 오직 그런 것들만 관심을 갖게 되어 있는, 그런 로봇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개별적인 존재의 왕권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인도사람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기차에 타지 못하고, 혹은 내리지 못해서, 마침내 왕권의 거대한 정신병의 늪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매우 집중하여 보면, 짜증이 도리어 사라질 수가 있다. 그리고 중국 여행을 실지로 다닌다면, 내용의 한가지 한 가지가, 낯설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 것인 양 다가오기보다는, 공수레공수거, 사기의 것은 오직 사기가 수거한다는 명제처럼, 그렇게 사라질 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만화처럼 상상이 되는 것은, 시황제의 고전이 모두 출간되고, 한반도의 유리왕 세력이 왕자들과 학자들과 함께 삼국사기를 또한 맞불로써 출간하니, 그것을 나이가 들고 읽고는, 도리어 사람이 나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자자돌림의 시황제의 고전이 사람을 강조하다가, 거대한 설산의 위용을 과시하자,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한반도의 작은 사람들이 그런 옥룡설산에 위축되어서, 작은 설악산의 미시령을 적어 내려 갔으나, 중국의 시황제는 마음이 도리어 허하고, 방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황제 본기 어딘가에, 가을이 되어, 말과 사람들이 옛날보다 많이 줄었다는 표현을 집어넣었는지 모른다. 학자들은 본문들을 외울 수 있으나, 상인들의 눈에는, 군인들의 정찰 보고는, 그것이 전부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 이얼싼쓰, 리얼리즘의 정신일 것이다.

 

한 명은 뇌자이고, 한 명은 염자인데, 둘 모두, 뇌염모기의 실험에, 주인과 하인처럼 참여하여 죽었다.

 

그것은 미시적이고, 슬픈 것이지, 짜증 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곳곳의 사당을 모두 돌아다녀도, 모기 목숨보다 못했던 어느 과거의 실제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