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숫자는 밀도일까? 정수일까?
마음대로다
2026. 4. 12. 09:23
숫자는 밀도일까? 정수일까?
나는 나의 교회에 예쁜 여학생이 나타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당회장 목사도 아니었고, 하물며 부목사, 전도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디마디홍, 무슨 말인지, 어떤 대사인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동양 삼국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어째서 헤어지는 빌미, 혹은 밀지, 혹은 이유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나타난, 인간 존재의 에테르 속에서, 그렇게 나타난,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서, 도사들은 자기들의 모든 술법들, 도면들, 집과, 담들, 담양들, 낮은 울타리, 그런 것들을 모두 총동원했었다. 그와 같은 도식을 과연 소년은 인지하였을까? 자기의 술법으로, 공각기동대나, 공작왕으로 인지하였을까? 아니면 저것은 과장이고, 저것은 부장, 저것은 이사라고 여겼을까? 저것은 사장, 저것은 사외이사. 우리가 좋은 담을 보고, 좋은 돌을 보고, 풀과 나무를 보고, 지성이 자라는 것은, 기쁜 일이나, 그런 인간의 숨은 비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같은 내용으로 보자면, 그런 것들을 보고, 지성이 도리어 뚝뚝 떨어지는 길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큰 수영장의 워터슬라이드 같다. 처음에는 워터슬라이드도, 사랑을 키우고, 우정, 그리고 세상 사는 재미를 갖게 하지만, 나중에는, 워터슬라이드, 말 그대로 인간은 삼 분의 이가 물로 되어 있다는, 컴퓨터 같은 자기인지로 나아가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이 세상에, 배가 등장하여서, 배를 중심으로 한 철학은 없다 보니까, 배가 등장하여서, 중국이 현대화되고, 비행기가 등장하여서, 미국이 텅 빈 공간으로 둘 수 없는 곳이 되었고, 티비가 등장하여서, 영화관도 아닌,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의 떨어지는 감성이라도, 워터 슬라이드, 혹은 슬라이딩 도얼스, 잡아채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흡사, 뉘앙스를 찾아 돌아다니는, 하이에나 여인들처럼, 프랑스를 사랑하던 우리 옛 모습과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그래서, 형사취수, 한국 드라마가 취소가 되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우리들이 우리들의 시선으로는 잘 감지가 되지 않는, 골다공증이 그들에게 있다는 보고일 수가 있다. 중국인들도, 친절하게 하려다가, 일본인처럼 보일까 봐 대충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골다공증이 아니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 한국 사람도 친절하고, 그 옛날 아름다운 영화 음악들처럼, 중국 사람들도, 태국 사람들도, 친절하기를 소원한다. 북한 사람들도.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정신의 일본 기원설, 너무 오랫동안 친절한 척해서, 이제는 그것이 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이 즐겁고, 버는 것이 괜찮고, 친구 관계가 원활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쓰는 글들이 하나 같이 아름다울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것에게, 친절하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 사람들은 친절한 것일까? 마땅한 인과가 없지 않은가?
교회에, 예쁜 여학생이 나타나는 숫자는, 한 다섯 정도가 된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없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나 절이 아예 없다. 그냥 연예인들만 좋아하는 중국 상태가 된다. 일본 상태가 된다. 나에게 숫자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 한창때의 미국 영화가, 한창훈, 결코 철학 논문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교회에, 예쁜 여학생들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여학생들이, 나이 든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지금으로 보면 케이 한류를,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교회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싸가지 없게 구는 이는 없다. 다들, 일본 사람들처럼 친절하고,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갈까 봐, 이단의 공동체처럼 전전긍긍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교회가 크면, 그런 장점이 있다. 이점이 있다. 마음이 지식이 많은 것처럼, 마치 그런 자가 된 것처럼, 다소 들고 나는 것에, 서늘해지고, 선선해지고, 초연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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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 막강한 정수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중국에게 테스트가 가지 않았다. 일본에게는 갔으나, 그들에게는 장학우의 역할만 주어졌다. 오직 한국 사람들에게만, 클래식 음악의 정수가 침입할 때, 우리나라 육십 년대의 베트남 전쟁에서처럼, 사람들의 높은 풀에, 거기서부터 피가 나오는지 지켜보는 것이 되었다. 숫자가 있으나, 마카오도 그렇고, 진추아도 그렇고, 성룡도 너무 멀리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있기 전부터 그랬고, 내가 아무런 국내 대도시의 시향들과도 상관없이, 아무 상관없이, 인천 공항이 그런 느낌이 있는데, 쿤밍 창수이 공항,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지금 아이들이, 몸을 옆에서 살짝 누르면, 클래식에 대한 정수가 나오는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있는 비밀 같은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금도 창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이 정수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연주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들조차, 클래식 음악이 정수인 사람들이 있다. 전쟁과 클래식. 거기서부터 정수처럼, 조개의 관족처럼, 흘러나온 팝송들. 그리고 숱한 동시적인 세미 클래식과 연주들. 그런 것들을 챙긴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세계적인 음악가 한 명 나오지 않고, 작곡가, 그리고 세계적인 문학가 한 명 나오지 않고, 어째서 우리가, 세계 모든 문화와 문명의 허브 공항이 되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은 밀도일까? 아니면 정수일까?
올해도 진해 벚꽃 축제에 가지 못했다. 평생 한 번 가본 적이 없다가, 쿤밍 여행을 다녀오고, 저녁에 오토바이로 한번 돌아볼까 했는데, 감기 걸리고, 날씨도 이틀에 한 번씩 비가 오고 그랬다. 그리고 며칠 전에, 몸에 차도가 있어서, 밀도가 완화되고, 정수처럼 건강해져서, 돌아보았는데, 꽃들이 모두 져 있는 것이었다. 노화가 옛날 같지 않다지만, 늙음으로 얻어맞은 중년의 인간들 같았다.
한국 사람들이 아무런 정수도, 클래식 음악도, 민희 시리즈도, 장편 소설도 없이 살다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보기에, 자기들과 똑같이, 혹은 더 빈약하게 살다가, 너무나 선명한 정수들을, 한없이 모호하고 희미한 숫자의 나열 끝에, 펼쳐 보일 때는, 얼마나 쟁반 노래방처럼, 자기들의 쟁반이 하늘 높이 치솟고, 온갖 접시들이 땅에 떨어지고, 머리가 아프며, 음식들이 나뒹구는, 개들도 주인의 빵 하는 소리에, 더 이상 오사카 사람들처럼 쓰러지지 않는 상태가 되었겠는가? 그것이 교회에서, 약간 먼저 전도사가 된 것 같은 어린 남학생에게, 외지에서 갑자기, 여학생이 남파 간첩처럼 침투하여서, 서로 일본 사람처럼 극진한 예의로써, 인사를 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서로 잘 모르는 것으로 있었다.
그러나 한자가, 더 이상의 밀도도, 심우준, 심지어는 정수도 되지 못할 때는, 한국 사람들이 심쿵해 노래하고 춤만 추어도,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의 황산 호흡이 멈춘다는 말이 있다.
화산이 멈춘다는 말이 있다.
타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