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죽음의 너머

마음대로다 2026. 7. 8. 22:42

죽음의 너머

 

 

 

 
 
 

 

 

 

우리는 수요 예배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토요집회, 그리고 일요일 예배만 드렸다. 그러나 수요 예배에도, 금요일 예배, 일요일 저녁 예배에도,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나가야 했다. 그곳은 평범한, 그리고 고급스러운, 그리고 성실한 착하고 크리스찬들, 찬찬하고, 찬송하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찬찬, 그런 것이 있었다. 그곳은 예술의 평범성이었고, 지치지 않는 예배 열기였으며, 아무래도 천국에 갈 때, 가장 먼저 명부를 확인할 사람들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마치 컨테이너 항구에서, 데크에서 검수 작업을 하고 나오는 사람처럼, 무책임하게, 거기서부터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가난했고, 다만 짧은 머리에, 저렴한 뿔테 안경을 썼다. 겨울 외투는 맵시가 없고, 조금만 걸었다 하면 마이마이로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남자마저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빨로우를 할 수 있다. 남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좀 더 진실한 진실이, 최진실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남자들은, 예뻐야 좋아하고, 옷이 어울려야 좋아하지만, 그것이 없을 때는, 나의 경우에서도, 마음이 귀신처럼 빠져나가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옷을 자기에게 덧붙이는 것처럼, 그런 것은 나중에 덧붙이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그런 의상철학이나, 그런 마음의 영원한 동물적 실체적인 견유학파인 것이다. 인간의 능선을 진행하는 탁월한 안목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골이 그렇게 아름다웠다. 남자의 관점에서는 메시가 꼴불견이지만, 여자의 관점에서는 두 번째 골이 거둘 수 있는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여자에게 지혜가 없다고 하면 곤란하다.

 

나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집에 가는데,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을, 어두운 거리에서 확인하고는, 다소 슬프고, 담담하고, 너무 먼 남의 걱정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선명한 것이었다. 너무 이상한 목사에, 너무 이상한 복음성가면, 집에 가서 유튜브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나, 진리의 미시적인 능선을 비행하는 평균의 예배라고 한다면, 승패는 역력하다.

 

하지만 거기서도 강강수월래로,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모르는 것들이 발생한다. 안압지 같기도 하고, 포석정 같기도 하다. 살인자가, 살인 후에, 추억에 잠겨, 죽은 사람을 향해 안압지?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첨성대의 우뚝 선 살목지 모습처럼 호러블 한 것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을 모두, 늘이고 늘여서,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모르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요청될 때가 있다. 사람은 영화 안에서 죽는 것 같으나, 죽음의 카멜레온 안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함께 죽는 이들 중에서, 라디오를 듣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항구에서 일할 때도, 일이 너무 힘들면, 라디오를 들을 마음이 생기지 않으나, 나중에는, 새벽에도, 가볍게 듣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무슨 말도 하고, 음악도 들려준다. 사람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리는 것처럼, 실은 영화에서도 죽고, 비평에서도 죽는 것이다.

 

모든 민족은, 자기들 중에서, 훌륭한 시인이 나오고, 영화감독이 나와서, 아름다운 죽음의 이불을 덮어주었으면 한다.

 

빠이널 커튼.

 

박정희와 빠이널 커튼의 미국 가수는 말하는 호흡이 비슷한 데가 있다. 그래서 그 미국 노래가 절절할 때, 그것의 비정상적 입체가, 우리들 가난한 달동네 문틈에서도 비쳤던 것이다.

 

우리는 누가 그렇다면 빠이널? 물을 수 있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한국의 라디오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의 내면적인 확장이, 리버스 콜로니적 확장이, 이미 일제나 청일전쟁에서부터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 죽지만, 늘 죽지만, 다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때는 보이지 않다가, 일차대전, 이차대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객관성을 목도하고는, 미국의 팝 문화와 신흥 예술 대중 영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악보는, 한국의 널빤지, 창호지, 벽지, 흙벽, 그런 빠이널 커튼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김. 유한 킴벌리. 킴 카사디안. 정글의 법칙에서의 카사바. 그와 같은 카투사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가설이다 여길 수 있다. 코로나는 확진할 수 있어도, 그런 가설은 도무지 누구도, 지금도 있는 판잣집의 판사도, 판결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백제는, 매우 현대적이지만, 너무나 오래된, 고려가 아니라 고조선의 시대에 있었던 것 같은 삼국사기의 국호명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백제는, 고전에서는 다만 어린아이의 꿈과 같은 학문적 소망이었을 것이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 보편적인 정신의 실제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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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돌아올 수 없었다.

 

만주에서 죽은 병사들이, 살아서, 가미가제로 갔으나, 보통의 인간적인 정신력으로서는, 자기들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김치는, 아주 작은 그릇에 담아, 숨어서 먹었다. 다만 김치를 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감방에 갇히고, 맞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으로 한 달을 지내고, 일본인으로 나머지를 지낸다고 해도, 시모노세키에서 호의호식한다고 해도, 소나무 떼면서, 흰 밥에 김치, 멸치 된장국을 먹었던 때만 기억이 났다.

 

한국에서 보름, 일본에서 두 달, 나머지를 미국에서 호의호식한다고 해도, 그들은 가미가제로 죽는 삶이 유일한 경험이고, 센소리 익스피리언스, 기억이 되었다.

 

빠이널 커튼은, 어느 중식 대가가, 약간 중국풍의 한국 배우에게 선물한 중식도와 같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말은, 표현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한국 대학생들이, 옛날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남들이 버리는 소뼈를 구해서, 국을 진하게 끓여 먹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고기를 많이 먹으면,

 

가난한 한국 사람들에게

 

칭챙총 조롱거리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