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국문학적 중심
마음대로다
2026. 7. 26. 10:04
국문학적 중심
사람들은 다 어렵게 산다. 교육은 스파르타식 옛날 미국 영화 세트장과 같고, 넘어지면 마이클 키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국문학이 별 소재도 없고, 합당한 명제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창피한 것과, 안 창피한 것, 신창원과 안동, 그런 것이 아니라, 개념과 쇼핑 몰개념의 차이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약간 오늘의 일처럼도 느껴진다. 우리가 한창 벌거벗은 한국사를 볼 때, 사람들이 젊은 이어령을 보고 환호를 했던 것은, 그가 객관적인 서머셋 모옴을 하다가, 그나마 주관적인 어떤 정통성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으로 믿었던 것일 수 있다. 그런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평중도 실제로는 따로 헬쓰를 하는 것처럼 다부진 인상을 주지만, 늘 개그맨 길처럼, 시류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 한국 역사상 최초로, 다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료의 사실만 갖고, 시류에 휩쓸리는, 그런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체격도 좋고, 목소리에서도 제법 연병장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일본 에이브이 남자 배우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소찬휘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일본인이 성시경이 너무 먹는 것만 유튜브에 올린다는 말을 내가 거들자, 그에게 좋은 방송이 생긴 것처럼, 이러한 국제간의 비판이 그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말을 잘 못할 때, 김응룡처럼 말을 잘 못할 때, 이문열이 툭하면 말을 잘 못할 때, 뭔가 풀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형이상학이란, 성실하고 잦으며, 하늘을 향해서 풀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형이상학과 수사학적 달변이 만나게 되면, 우리는 일년생 초목이, 십년생 과수로 변했나, 기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제하고도, 다만 이어령이 앤소니 홉킨스처럼 어용학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렇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웰컴투 인디아도 그렇다. 그런 말재간을 사랑의 교회에서 잔뜩 제안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결국 인하대학교처럼, 웰컴투 인디아에서나 국문학적 중심을, 파고다를 세우고 있는 셈이다. 하긴, 국문학이 정말, 일본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음식 만들기를 했다고, 어느 치와와를 닮은 어용학자가 된장국이 어쩌고 저쩌고 할 때도 깜짝 놀랐지만, 그런 말을 할 때면, 호남을 제외하면 정국이 정말 다 그런 음식 만들기로 점철되고, 전철되었던가 싶은 것이다.
실제로 킬러들의 쇼핑몰에서 파신을 닮은 사람이, 이제는 국적을 바꿔, 인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교이고, 우연이며, 사랑이고, 만남이고, 없는 것보다는 밤하늘의 별처럼 화려하고 나은, 인터넷 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 개가 모두, 국문학적 현상학적 기둥, 안과 밖이 정확하게 일치한 시간과 체적을 보여준다 하겠다.
껍데기는 가라고 했다고, 이탈리아에서 피자를 만들다가, 그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서, 인도에서 길거리 음식을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상적인 해외여행에, 그와 같은 시가 너무 싸구려 길거리 음식 같이, 껍데기라는 말도 껍데기 같고, 가라라는 말도, 일본말 가라 같고 그렇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문학은 진정 파신인가? 그래서 웰컴투 인디아도, 실은 남의 나라의 이상한 사정이나 한국말적 말재간을 갖고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병적 극치를, 일종의 메디칼 드라마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경기도 여주처럼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파신이 인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충격이지만, 웰컴투 인디아도 충격적이지만, 먼저 인디아 시리즈는 그래도, 조율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를 흉내내는 무수한 사람들의 사탄적인 중심성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도 내용에 판촉물을 고려하는 것들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런 모든 것들이, 젊은 한국사 시리즈의 인기가, 십 년 넘게 지속되다가, 마침내 왕사남에 걸려서, 와사비는 아닌, 와사비가 키우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은 아닌, 하나의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그 정도의 개안으로도, 한국사가 금세 이어령화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가장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능가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국문학생들은, 국문학적 중심이라고 하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킬러들의 수다에서 파신이 인도인으로 변신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도 여행을 한 다음에, 돌아오는 것은, 외부세력에의 영원한 포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한된 방에 가둔 다음에, 그것만 계속해서 틀어준다면, 뭔가, 일본어로 난까, 수직과 수평의 숫자가 그 무엇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그것이 너무 서로 비슷해서, 뭔가, 일본어로 난까, 나를 향한 시험, 토익, 토플 시험 응시 삼십만원, 토마스 하디의 테스, 그런 생각도 조금은 하게 된다.
그들도 모두, 그렇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신이 어린 소녀에게 무술을 가르칠 때도, 그러한 드라마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무수리, 궁궐의 무수리 많았지만, 그것들이 다 영화 무수단이 되지 않고, 다만 무수리가 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냄비는 열기로 먹는 것이지, 우리가 그와 같은 열기에 대한 추억을 잊게 되면, 우리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웰컴투 인디아도 그렇다. 인디아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한국 사람들의 유튜브 시간에 들어오겠는가? 오직 사실을 보고하는 자격으로만, 입장하여, 욕을 듣는, 이상한 모순의 시간이겠지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벌거벗은 한국사. 선생이 오직 있는 사료만을 갖고, 더욱 서머셋 모옴 하여서, 말했을 뿐인데, 시류에 휩쓸리는 것은, 자기로서는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나 싶다. 내가 이어령을 좋아하는 것도, 마치 황하와 바다가 만나는 것처럼, 백 번의 여자들의 조선 드라마보다, 한국사 드라마보다, 그런 서머셋 모옴의 정리가 한없이 괜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리와 요약, 비평의 아름다운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 사탄의 권력 앞에서, 도리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신비롭다. 잔잔하고 은근하며, 성실하고, 정리적이었을 뿐인데, 어째서 사탄에게 이용만 당하다 말았는가?
그렇게 몇 명이 판넬처럼 모여 있던 것도, 처음에는 기발하고, 재밌었지만, 지금은 고기 반찬과 풀 반찬에 조화를 상실한 것처럼, 누구는 고기반찬만 있는 느끼함이 그나마 영양 면에서도 좋다 하겠지만, 그것조차 매우 우스운 것처럼, 풀 반찬 비빔밥에 너무 많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은 것처럼, 신경이 날카롭게 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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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미국 영화 듄이 삼탄이 나오고 있고
사탄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문학은 그렇게 최수종이 니조랄 선전을 할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늘 미국의 인문학적 니조랄의 인격으로만 치대지는 운명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이어령은
졸렬하다 하기에는
분명 이병우의
느낌이 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의 음악만 기억하는, '아들'의 숨 막히는 전개가 그렇게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문자를 서로 확인하고 익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쳇말로
딸을 치는 것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