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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괜찮아, 사랑이야 1, 2편을 보고: 리얼리즘에 대한 갈망은 나의 것인가.......

by 마음대로다 2014. 7. 24.

괜찮아, 사랑이야 1, 2편을 보고: 리얼리즘에 대한 갈망은 나의 것인가.......

 

 

 

 

 

 

 

 

며칠 전에 법원에서 조교수와 학생이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키스를 했다고 성추행으로 판결했다고 한다. 오늘은 어떤 학생이 카카오톡으로 몇번이고 쌍욕을 해서, 학교폭력으로, 법원이......

 

 

 

나는 첫번째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포장지를 조금 떼어내고 말을 만든 줄 알아서, 돼지주물럭을 어느 정도 먹어서, 잠을 자지 못한 것까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두번째 법원에 대한 강제 경매 법원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못된 송아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 엉덩이가 뜨거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진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멈춰야 한다. 이태리 가게에서 가져다 주는 쏘스를 다 먹다가 보면, 정작 우리 본래의 식감을 상실할 수가 있다. 대가들은 그래서 쏘스를 적당히 친다. 이 말을 두고 토를 달 사람이 없듯 싶다. 그럼, 쏘스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닌데, 맛이 없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혹은 박노해 바라는 것은,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무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이 잘 접혀져 있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리. 얼. 리. 즘........ 우리는 리얼리즘을 바란다. 안리얼리즘은 상대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판타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리얼리즘이 때로는 너무 뜨겁고, 사납고, 어리석으며, 우리의 본체를 빼낼 것처럼 여겨져서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다윗이 보았던 우리아의 아내도, 내가 늘 말하는 바이지만, 죽은 부하 장군의 아내의 똑똑함을 아까워한 것일 수가 있다. 밧세바가 학자로 등용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호조판서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죽은 부하 장군의 아내가 똑똑한 것이,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찰라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언제나 차고 넘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다윗에게 아내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다윗이 붉은 색이면, 밧세바가 겨우 푸른 색으로 나머지 색을 채운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리얼리즘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여자들이 똑똑하면서도, 남자의 마초틱한 것에 혼몽하고자 하는 것과, 남자의 파시즘적인 것에 넘어가는 것과, 남자의 마키아벨리즘적인 문법에 도리어 정신이 불타오르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제법 똑똑한 류의 버지니아 슬림인 것이다. 혹은 파일러먼트. 남자들이 그렇게도 파트너쉽을 갈망하면서도, 때로는 바쇼의 개구리 하이쿠처럼 맹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같은 아니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양명학이 본래 좋은 것이다. 사람이 갓을 쓰고, 뜨겁게 정신을 술로 채우면, 저녁의 환한 등불에서도 기생은 분명 천추태후처럼 나의 서울을 점령한다. 선조는 넋이 나갔다고 했고, 주변 사람들은 돌을 입에 물고는 묵언시위를 했다고 한다. 리얼리즘을 바라게 만드는 것이 어쩌면, 문학교육의 첫번째 헌장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고, 전쟁과 기층의 소재는 사람들의 온돌방의 등짝을 당연시하였다. 때로는 일본 다다미 방이 그와 같은 소설의 체결을 선도하였다고도 했을 시기가 있었다. 삐꺽거리면서도,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나마 관념의 최진행을 가져보는 것으로도 보였다. 그만큼 우리는 낙후하였고, 사람들이 기층에 빠지면, 영화건 소설이건 간에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김승옥의 신춘문예 등단작품이 우리에게 양명을, 그러니까 자기공명검사, MRI를 시키는 것은, 왠지 모르게 그 깊은 시각이 기층의 남녀지간으로 넘어갈 신분과 처지와 무드펄러브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게 나아가다가, 나아가지 않는. 심지어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름도 모르는 아내가 죽고, 갑자기 생긴 돈을 다 쓰고는 자기도 죽는. 마치, 삶과 죽음의 들러리들을 옆에 세우는 듯한, 문학적 카스트의 판단까지도 사람들의 최송연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처음 신춘문예 등단작품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반대의 관점으로 보면, 아카데믹과 연극의 정법으로 보면, 다만 파울치기 같은데 말이다. 리얼리즘은 사람들을 타는 광고판으로 만든다. 우리는 본시 예쁜 얼굴을 갖고 있다. 그것은 주자학이기도 하고, 동시에 양명학의 이상이기도 하다. 양명학은 이상으로서 대게 군림하나, 우물학이거나, 거울학 이상이 아니다. 양명학적으로 양파 껍질을 벗겨 현미경 처음 실험을 행한 여자들은 대게, 동물과도 하고 싶은 극단적인 성욕감을 맛보게 된다. 그것은 새턴. 토성으로서, 지구와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것이 달의 위치에 있는 것을 어느 사람이 묘사하기도 했다. 달이 달의 위치에 있을 때, 달달하지, 토성이 달의 위치에 있다 보면, 우리는 슬픔의 비감에나 휩싸이게 된다. 괜찮아, 사랑이야 일이편은 리얼리즘을 달렸다. 때로는 고통스러웠고, 때로는 내게만 보내는 카카오톡의 욕설 같았다.

 

 

 

사랑이 정치가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정치가 끝끝내 그와 같은 인간의 이념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질 때가 있다. 우리는 대게 대단한 이성끼리 이미 점령 중이 침대 위에, 마치 아이처럼 법률상의 부부지간의 권리로서 그 사이에 끼어 자고자 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그렇게 조용히 외쳤던 것이 아닌가?

 

 

리얼리즘은 만물의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