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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슬픈 시적 클러치를 향한 짧은 찰라와 같은 부분균질체: 벌교에서

by 마음대로다 2012. 10. 7.

슬픈 시적 클러치를 향한 짧은 찰라와 같은 부분균질체: 벌교에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지금 이경영의 고문 영화가 대 히트 중이다. 그것은 태공조의 자랑 상태이기도 하고, 코스모폴리탄들의 옷벗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이경영이는 참 재수가 없다. 우리가, 여자들이, 고문 중에, 앞이 캄캄한 중에, 상대 남자가 영문학과를 나왔다고 한다면,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숨이 막히고, 그래 결정했어 딜레마에 빠지는 것처럼, 분명 영어를 대단히 잘하거나, 못하더라도 고인돌 같은 철학이 엿보이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하나뿐인 경차 같고, 그것을 남들이 못하는 튜닝 정도로 끈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어는 무의식을 시험한다. 배움의 영단어라는 것은 애플 수준이다. 이경영이를 보면, 망고 같기도 하고, 큰 애플 같기도 하고, 후쿠시마 바나나의 변종 같기도 하다. 한뻑큐와 이진우를 놓고 보면, 우리들은 버는 것은 짧은데, 쓰는 것은 물쓰듯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전부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부 게이라고 하기에는, 시라노 게이치로 어울리지 않다. 성기를 딱히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피곤하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국적이 불문가지 한 부분균질체가 어디 한두 사람이겠는가? 서로의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이경뻐규....... 사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혼내주는, 사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 이 말을 하면, 사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면서 달라들겠는가? 아니면 부산영화제가 사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우리의 정신적인 난맥상이 그런 폭탄 영화를 필요로 하는가? 오면서 송광사에도 들렀다. 그것들은 싱어송의 송광사가 아니다. 우연히 만났더니, 그것은 잘모르겠다고 했다. 희망이 있는 것이, 내가 훈계를 하자,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나는 가수다라는 엠비씨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송광사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네인가 했다. 그랬더니 잘 모르겠고, 관련이 없다 하였다. 내가 소나무 그늘 아래서 어느 도인이 설법을 하고, 노래도 하고,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면, 그것이 송광사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몇 번을 반복해서 찾아와도 그런 기미를 볼 수 없다면, 본질은 따로 있고, 가죽이나 가지들 밖에 없다 하지 않겠는가? 영어 공부를 할 때는, 한국 문학이 지력이 다해, 그것의 문학을 배우면서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절의 건물처럼, 전치사나, 관계대명사, 가주어, 진주어, 이런저런 관념어들이 그냥 듣고만 있어도 질서의 바람을 쐬는 듯 하다. 기독교인이 불교도인에게는 죄를 지은 범인이고, 종교인이 비종교인에게 같은 범인이며, 지식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같은 것이라면 부처님이 원하는 세상이겠는가? 그는 아니라고 했다. 앞으로 영어 공부도, 기타 공부도 하겠노라고 했다. 그는 두 손으로 인사했고, 나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영어 공부는 대개 착하거나, 똑똑하거나 하면 다 하는 것이다. 토익도 잘하고, 토플도 잘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성공해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 이웃 사람의 기계에 이상을 가져오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기민성이 있는 사람만이 반드시 서울에서 성공하곤 한다. 한국어가 메시지가 많고, 영어가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송광사. 상당 부분 동시동작적이다. 한국어에 책임이 없고, 부모로서 아들들에게 할 말이 없는 경우, 영어 실력도, 한문 실력도 개차반일 때가 많다. 그것은 필연이다. 단계를 넘어가면, 쏘세지와 맥주를 먹을 수 있는데, 개처럼 훈련을 받으면 좋은 단계에 뛰어 오르려고 기를 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사실, 이미 문학, 아니 적어도 언어의 영혼도 아니게 된다. 폴리탄들을 보면, 적당한 인체와 얼굴을 하면 나의 가난을 위로하려는 아무런 지붕도 마련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편의점에는 쓰레기까지 나란하게 놓고, 치우려고 했다고 하며, 바깥에서 친구들과 너덜너덜 떠들곤 한다. 신기한 것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들은 표상이 생겼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들은 무슨 법칙이 따로 있는 것처럼 좌빨우빨 아직도 살아있는 서로군정서마냥 도식적으로 세력을 과시한다. 학익진이다 하면, 내가 조선 수군일 때, 금일봉이나, 상품권이나, 주유카드 같은 것을 건낼 만 하지 않은가? 그들은 공기와 같고, 브라운관 같고,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도 그것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늘 그렇게 말한다. 지옥에 갈 것이다. 너희가 나와 국가의 육체를 나누고 있다 믿는 것처럼, 구경하다가 비슷한 곤장 체험도 할 것이고, 구경하다가 주리 체험도 할 것이다 한다. 그 말이 거두워지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선의지가 없으면 반드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영문학은 사실, 지옥문학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우리 집에는 이상한 것을 지어놓고, 지들끼리는 늘 깨끗한 척 지내는 천년 묵은 구렁이라는 것은, 그들이 구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서 드는 생각이 무책임의 대지를 비행하고, 민중들의 경제력 없음의 피안으로 숨고, 추운 바깥 날씨에 차안으로 숨고 하는 것들의, 부분연속균질체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누군가는 분황사 석탑과 같은 관념의 벽돌집을 짓고, 누군가는 송광사나 선암사의, 천년 고찰의 미친 뱀길을 닮아 뱀이나 되는 것이다.

 

나실인은 한국어를 반드시 잘하고, 친구들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 없이, 영어를 또한 잘하는 벌교 친구이다. 영단어를 단어장에 갖고 다니고, 그것의 부분균질처럼 문학도 잘하는 사람이다. 영문학은 영어로 읽어도 맛이 있고, 한국어 번역으로 읽어도 쵝오이다. 영어로 읽어야 한다면서 읽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문학은, 반드시 자기가 한 번 쓸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질주하는 도로와 같다. 우리가 도로를 신봉하고, 송광사의 부처님이다 예불을 행하지 않는 것처럼, 오가는 것이 산뜻하고, 자유로우며, 선남들의 보호 아래 선녀들이 오가는 통로인 것이다. 그런데 선녀를 이경뻐큐는 섬기고, 틈만 나면, 그런 반복적인 균질들, 그러니 그나마 올망졸망한 벽돌도 우주 속에서는 아니 보이는 것이다. 뱀을 잡아 먹는 개구리의 사진들이 심심치 않게 오르는데, 지옥과 같은 그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의지가 체력과 포인트로서는 부분균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책임하게, 무책임의 영채를 좇아, 한국 사찰만을 열 개 이상을 돌아도, 폴리탄들은 뱀이 된다. 선의지는 가면 같고, 호국불교는 캐츠프레이즈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경뻐큐 같은 세도권력자들을 좋아한다. 공부 안하는 영문학 같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이 심판하려고 하면, 그런 남편을 위해 둘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쌍스러운 어린아이 단계가 아니라고 해도, 영문학적인, 그 기초적인, 인과도 없는 과학은 사문나적과 같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같은 하늘 아래서, 거짐 황제의 마차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귀한 첼로 음악 같은? 여러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