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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나는 장미인애를 사랑한다. 새드 리사

by 마음대로다 2013. 1. 24.

나는 장미인애를 사랑한다. 새드 리사

 

 

 

 

 

 

 

 

우주목 같은 폭포 안에서, 회상의 주권이 오직 내게만 있는 것 같다해도, 어찌 남의 슬픔과 어색한 의자가 마음에 들겠는가? 슬픔은 동유럽의 도시 보도와 같고, 어수룩한 아침 안개는 오전 경계 근무를 찾아가는 강원도 군인 같다. 그렇다고 검찰의 캐릭터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검찰은 온 몸을 붕대로 하고 있고, 그것은 텐파츠, 그것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청계천의 해체되지 않는 옛모습 그대로의 밀착 경호 속에서, 모자란 전두환이니 박정희니 하는 것들도 지키고, 보듬고 하는 것은, 그것의 봉급멘타리들이 너무 민주 세력을 타박하지 않는 시간으로 질주하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보다 과거 급부, 무슨 고종의 칙사니 밀령이니 하는 것의 기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근대 국가의 틀을 한일 축구 경기처럼 애니버서리하는 것 속에서, 그것을 눈뜨고 경험하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이 없고, 프랑켄슈타인처럼 망치에 찔리고, 나사가 늘 조여지고, 가슴이 쫀득쫀득해지지만, 체적의 바닷가에서 손톱을 깎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도 자주 쓰는 말이지만, 찌찌뽕, 타임투리브, 타임투킬. 아날로그 시계가 가다가 멈추면, 아픈 노모에게 먹을 것을 챙기는 칠십년대 사회적 분위기로서의 효자처럼, 건전지를 손수 챙기고, 그것을 보고만 있는 사무실 분위기를 단도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원효적인, 여기서는 제로, 쏘세지를 너무 많이 먹고 있고, 타고 있는 것들도 에스유비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면, 잘 모르는 양명의 대치 경계에서는 부하직원이 그러고 온 것 같은 느낌이 실지 드는 것이다. 그것은 가판대. 신문. 그리고 옥상. 신문은 사람들에게, 옥상은 회사원이 번지 점프를 할 것 같은, 자기는 다만 회사원일 뿐인데, 감정은 선험적 종합 판단이 되고, 지리산에 들어가 시인이라도 되고 싶지만, 지리산이 옛날의 크기가 아닌 것이고, 차라리 중국의 어느 대륙이나 호숫가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사과를 하나 반쪽 쪼개면, 하나는 부사산이 그렇게도 유비가 되었던 이웃 일본의 성장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지산이 후져보인다는 마음만 독일 쏘세지 이 모든 것이 그쪽의 시스템인 것인가 철학 입문도 하지 않는 사람의 섵부른 판단인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 전공 영어나 깨깽했으면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 서울대 영문학과만 제외하고, 연세대부터 무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가.판.대. 태종대 앞바다 같은 넘실거리는 오만함. 가르타고보면, 머저리 같은 전두환도 지키고 있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는 청계천 분자들이 천변풍경의 초반 풍경처럼 그려지기는 한다. 사람은 논리로도 살지만, 행복의 증거와 양명적인 연장으로 분명 살기 때문이다. 고종의 칙서나 율법, 소설적 시스템이 있었으면 사람들은 산헤드린처럼 그것을 지키고, 천재들이 태어나면 불빛 아래서 대화법으로 그들의 건물을 유지했을 것이다. 정말. 암 것도. 애니 해슬렘. 암 것도 없다보니까, 박정희 박정희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의 질주. 행복했던 통금. 스며나왔던 서스펜션. 머저리 같았지만 나름으로는 문학생처럼 비쳤던 대중 가요 검열관들. 우리는 아우프헤붕을 못하니까, 그들의 태공조로부터 이미 피딱지로서 전해지는 붕대를 역발상처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검정색으로 고깝지만 재밌는 소설도 지을 만 하지만, 우리는 그만한 아방가르드 소설가들이 없었던 것이다. 번역은 롤랑 바르트를 빠짐 없이 했다하나, 우리는 늘 계급의식의 척척함의 파이터 바키만 좋아했지,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장미인애적인 몸매 아름다운 원죄로서의 백색 분자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워도 다시 한 번 했지만, 그것의 헤테로는 분명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민중 영혼의 성전까지 도달했지만, 중중이나 중상 혹은 이데와 같은 이상으로는 대상의 높은 마중이 없었던 것이다. 회사원들은 자살한다. 자기들의 모나드 하나씩의 천형으로 짐승이 되는 원인이 롤랑 바르트의 독서에 있다니. 너무 멀지 않은가? 포항공대의 영어 수업이 일정 기간 파행을 일으킨 것이, 아방가르드 소설을 쓰는 사람이 대 한민국에 한색키가 없고, 한국 여자들을 일본 육체로 마중 나가 청계천으로 합성하는 것으로밖에 국가가 연명하지 못한 죄에 기인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그들을 인문계생으로 만들어, 롤랑 바르트를 읽어도 별 내용이 나올 수 없는 뻔한 결과의 직접성으로 희생을 시켜야 하는가? 그러니..... 우리는 고통하고...... 관계가 자지와 보지만 같으면 옛날에 해결을 보았겠다 혀를 차게 되는 것이다. 신학생이나 특수화되고, 지나치게 장미인애 되어 있는 롤랑 바르트를 읽을 수 있다. 신학생도 입학식 전에 시지푸스의 신화나 플라톤의 대화록을 겨울 방학 기간에 읽어야만, 전희와 전희의 연속 속에서, 비로소 오르가즘이 가능하다. 전희가 뭔 줄 모르고, 전제나 디저트가 뭔 줄 모르고, 우리는 얼마나 아래는 아니라면서 옆 방으로들 뛰어가는가? 선배들이 혼내키는, 후배들이 기를 쓰고 죽지 않으려고 서서 죽은 환자 상태가 되는, 의사가 되는, 메디칼 드라마. 너의 사찰 이름은 그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장미인애를 언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사회적 고소 사건이 있고, 아무런 연관된 내용 없이 어떤 민중 권력자가 씨네 이십일 같은 데에 기고하는 것이다. 고소 사건을 동시에 언급하는 방법도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