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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폭력 어디에 있는가?

by 마음대로다 2021. 1. 10.

 

문학은 폭력 어디에 있는가?

 

 

 

 

 

 

 

 

사실 드라마 낮과 밤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가 공부자를 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은, 공부자는 일상의 존재가 아닌, 타임 트레블러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은 임금 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것도 약간 철인왕후에서 묘사된 것 같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직업은 결코, 공부자의 임금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고, 이것이 요추인데, 참으로 상상하기가 어렵고, 마다해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어머니가 태교를 잘하면, 아이가 똑똑한 아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태교 때문이기도 하겠고, 잘은 모르겠지만, 태교 이후에도, 아이가 아이된 상태에서도, 그 교육의 끊을 놓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교보다도, 현교가 낫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존재의 자기 현교에서 택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불쌍함 같은 것. 자기가 약하고, 어리니까, 불쌍함 같은 것. 그것들이 보이고, 춥고, 어리고, 약하고, 힘들게 일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태교는, 어린아이의 시절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은 너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으시다. 배신이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데, 너무 안 보이는 것이 많은 것이고, 순간 배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다들, 이전에 배신했던 내면이, 이력이, 보이는 자리에서 배신하게 하는 것이다. 문학은 슬프고, 택함이 예수님과 같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가 존재에 매혹을 받는 것은, 서양의 기독교도, 영국의 문학도, 다들 우리가 사는 쓸쓸한 대지에서, 겨울철의 도시에서, 교회 마당에서, 절의 나무에서, 흐르는 계곡에서일 것이고, 거기서 합성된 것일 것이다. 나는 해남 대흥사를 그렇게 가본 것 같았으나, 나중에, 나이 서른이 한참 넘어서, 겨우 오토바이로 한 번 방문한 것 밖에 없는 것을 두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런데, 가본 것 같았고, 여러 번 가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름이 해남이고, 이름이 대흥사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렇다는 이유로, 김흥국을 내 앞에서 툭하면, 높이는 조계사들을 보면, 가소롭고, 아니꼽고, 절차탁마대기만성 같고 그렇다. 인간은 추접하고, 비뚫어지고, 주자의 주변성을 그렇게 높이고, 좋아하고, 미칠이처럼, 영원히 돈도 없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한참을 지옥도 갔다와야 하고, 살인사건도 생각해야 하고, 떠돌이 인생도 생각해야 하고, 일본 에이브이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것들이 내 옆에 살면서도, 돈도 없고, 아무런 출구조사도 없는, 맹랑한 국회의원, 아니면 사무처 직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단어 앞에서, 김건모처럼, 하찮고, 노래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군인들이 행군 중에 걸어줘야, 겨우 균형이 맞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백번 말해도, 알아듣지 않고, 자기들끼리 또 조를 짜고, 콘티를 짜서, 뭔가 이상한 말을 인터넷에 올리고, 그에 맞는 말을 한답시고, 나를 찌르고, 조롱하고 하는 것이다. 집주인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석화되어 있는 것 같다. 항상 생각이 많고, 단어들이 많고, 그것들이 살아있다고 하나, 집주인이라는 말만 나오면, 어려서의 기억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갑자기 얼어붙는 것이다. 항상 좋은 자리에 있고, 항상 기용이 되면서, 나는 그렇다면, 아워 스윗홈에서의 연근 좀비인 것인가? 내가 차를 못 몰 이유가 무엇이고, 내가 공부를 해서, 사람들에게 승차감을 말해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씨이오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고, 내가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탤런트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고, 어째서 내가, 겨우, 개같은 미칠이 집주인의 사나운 말들이나 들어야 하는 것인가? 나라에서, 조두순에게, 백이십만원씩 준다는 것이 그렇게, 멀쩡하게 일하다가, 한낮에 일식을 당하는 것 같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은 방향으로 존만한 스크럼을 짜는 것이다. 인간이 지식이 없고, 한 번 주자와 붙어보는 것 밖에 옳고 그름의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과도 싸워야 하지만, 등급이 낮은 것들은, 사탄을 도리어 신뢰하고, 정부가 사탄 편인 것을 믿고, 늘 주자를 괴롭히는 것에, 그들의 외국어가 새로 조성이 되는 것이다. 경찰들은 나의 이와 같은 말들을 듣고, 마치 마약을 한 사람처럼, 사람 목이 왔다갔다 하고, 사물들이 부분적으로 팽창하고 줄고,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이 괴물들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고, 나의 말이 혹시 그런지, 아무튼 그런 방식으로의 지나친 변형은, 자기가 듣고, 들은 만큼 웃고, 생각해야 하니까, 피할 것이다. 우리가 삼십대를 살고, 사십대를 살고, 나처럼 오십대를 산다고 할 때, 영어를 그만큼 꾸준히 했다면, 적어도 나처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않는 이유는, 영어가 인격은 아니지만, 예를 든다면,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그 말들을 우리가 써보지 않아서인 것이고, 실은, 우리가 우리들의 나잇대에 맞는, 관념들을, 영어로 쓰기가 사실은 결코 쉽지 않아서인 것이다. 물을 달라면, 워터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워터 파크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시험적인 가치가 있어서, 그럴 듯 하게 구성해야 했지만, 서바이벌 잉글리쉬조차도, 나이가 들어서는, 땡큐와 단어만 알면, 여행지에서 인격이 좋은 신사가 되는 것이다. 대신에, 경험의 사람들처럼, 행여 경찰이고 형사면, 다치고, 죽은 범인들처럼, 숫자처럼, 몇 명의 동료처럼, 우리에게 자리하게 되는 관념이라는 것이, 실은 죽어서도 어려운 것인 것이다. 우리가 전쟁 이후에, 독재 정권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회적 관념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물리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경찰은 마침내 불의를 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존재이다. 보통의 우리는 불의의 핵심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씩씩거리면서, 관념을 진행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의 누적되는 시간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경찰이 되었다가, 문학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그와 같은 범주적인 상상력만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 맞는 희한한 천문학적인 숫자만 있는 것이다. 경찰이 만화적인 클리쉐를 익히다가, 범죄인이 되는 확률은 그래서 매우 높은 것이다. 경찰 패이보다, 만일 만화를 그려서 패이가 높다면, 만화가가 될 영혼과 육체가 얼마나 많은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에 걸맞는 육체가, 내가 보기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너무 깊은 조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황제의 육체일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물고기의 육체가 있다고 하신 것이다. 새의 육체도 그렇다. 만화가가 되면, 단번에 경찰을 버리고, 육체가 만화가가 될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원래, 훌륭한 경찰이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경찰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고, 그것은 그나마 우리 눈에 아름다운 모범 택시인 것이다.

 

대게의 문학가들은 불법의 핵심을 지나치고 만다. 왜냐하면, 손이 작고, 힘이 없고, 체력이 없고, 무술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지내고, 권력의 도움도 없고, 때로는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인격이 있다면, 하나 재밌는 실험이 있다면, 그와 같은 경찰은, 불가능한 작품 앞에서, 테오티후아칸의 피라미드의 정상 부근에서, 기억과 형상의 오버랩 같은 것, 문학가들은 약해서 손을 털고, 형사들은 그런 섬세한 이념이나 문학적 경험에서는 수사권을 발휘해 본 적이 없어서, 빠져나오는 것에서, 그들 모두가 자기를 버린 자리에서, 인간이 그럴 수는 없노라고, 도리어 슬픈 폭력에 휩싸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관념과 같고, 몇 미터, 하늘에 가까운 높이와 같고, 그것들의 연결과 같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역린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실은 문학하는 사람이, 고급한, 그리고 철학하는 사람이, 진정한, 자기 땅에서 열심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장소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알 수가 없으니까, 자기에게 모든 수레바퀴가, 톱니, 기어가 모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문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을 둘러싼 민족주의, 발전, 사조직의 무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의 인과가 불분명하고, 처음은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며, 글자 한 자 모르는 문회한이기 때문에, 누군가 선동을 하면, 다섯 이상을 세지 못하는 사람이 마침내 그것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잠입 경찰들이, 다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싹을 어떻게든지, 안에서의 소란과, 밖에서의 조롱과, 정신이 성기와 같은 사람들의 과도한 두려움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차원에서, 작동하여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제외하고는, 문동환의 무당으로서의 예언자 예수 말고는, 관념이 있지를 않으니까, 곽노순의 예수 현상학은 다만 내가 아는 한국어 관념이라는 차원에서 끼워놓자면, 원불교 같은 것도 허용이 되고, 사람들이 숱한 실험과 교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처럼 소외받은 사회생활에서도, 글을 쓰고, 생각하고, 혼자서도, 영어공부를 잘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 어째서 그 많은 정신의 쏘스 같은, 남의 나라 정신을 상찬할 운명의 이단들이 있겠는가? 경찰도, 단 하나의 관념이 없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느끼고, 한국 땅에 맹목적인 것이 있는지 모른다. 죽음은, 이단도, 슬프기 때문이다. 훔친 적도 없는, 사람들이면, 겁이 많아 죽은 것을, 자기들끼리 보고 받으면서, 그대로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경찰들은 단단하고, 많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종교의 현상, 그것의 도형 같은 것은 그릴 수가 없고, 다만 남들처럼 사소하게 매혹되는 것은 없는 차원인 것이다. 사기꾼들이, 보통 사람들을 모집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답답하여지면, 자각몽 속에서, 자기들끼리 죽이게 되는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은, 고급한, 그러니까 형용사의 용사의 집에 있지 않은 사람은, 도리어 오바로크가 멋진 자켓을 입고, 오토바이를 질주하는 우리들의 대지를, 경찰은 한 명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에게는, 주자 옆에서의 재생이 있고, 아주 한 시간씩, 우리말 단어의 슬기와, 진정한 의미들을 배우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저급한 문학하는 사람도, 경찰이 되면, 그리고 경찰을 넘어서는 관념을 사람들과 함께 일구려고 하면, 신흥 종교라는 것은 사실, 있을 수가 없어서, 경찰과 똑같이 파괴와, 방화의 층을 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변진섭을 비롯한 우리들 조금 오랜 가수들의 콘서트장과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사탄이 좋아하고, 늘 지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