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아프리카적 근원에 관한 오랜 탐구
국가별 인터넷 속도가 태국에도 밀려, 우리 한국이 칠 위를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것은 요한복음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신비로운 우물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우울하게 있자, 누군가 요한복음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은 사연이, 그것은 비유가 아닌 것 같아 기쁘지만, 여간 슬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검은 물 같고, 그것은 먼 것 같고, 먼 친척 같고, 유럽과 아프리카는 가깝지 않은가? 스핑크스가 영국이나 프랑스, 핀란드를 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새벽에는, 어느 날에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았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말을 늘 하는 것은, 스핑크스가 늘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행여 누군가처럼 돌아보면, 돌이 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맨날 하는 말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군인들은 말이 어눌해지게 되어 있다. 군인들끼리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몸과 혀가, 굳어지는 것을 실감해서이다. 그러니, 오랜 훈련이 끝난 뒤에, 더욱 재미나게, 비록 같은 계급들끼리이겠지만, 계급의 방향이겠지만, 유난히 말이 많아지고, 즐거워지고, 피엑스도 자주 가게 되고 하는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스핑크스처럼, 동쪽 하늘만 보았다. 왜냐하면, 한번 저주와, 저주에 대한 염려와, 개 같은 서부장들의 협박에 짓눌리게 되면, 김밥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디오게네스 뿐만 아니었다. 거의 모든 이차 삼차 학자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오직 그것만을 썼기 때문에, 필로폰네소스도, 타키투스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그런 정말 우리가 읽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고전을 접해서, 훈련하고 학습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다부지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종합적인 말을 할 줄 모르고, 분석적인 말만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종합적인 말은, 어리고, 약하고, 종속과 노예적 상태에 솔직하며,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 왕이, 허튼, 즐거움이 풍부하여, 때로는 사탄처럼 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티비 같고, 사극 같고, 왕자나 공주 같고, 해년 마다 티비 같고, 양녕대군을 알아봤다가, 몰라봤다가, 알아봤다가, 몰라봤다가,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은, 나이가 어렸을 때는 그런 진공관이 예뻐 보이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오징어와 헬멧 소리가, 로봇 같은 느낌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은 진화하나, 트랜스포머 원투쓰리, 자기는 오징어 뼈를 갖게 되거나, 락스터, 정도로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석적인, 다부진, 그런 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그와 같은 군인들은 필요하다 싶다. 그러나 자칫하면, 집 안 사람들 모두가 군인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군인은 여러 계급 중에 하나일 뿐이다. 스파르타는 군인들만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모두가 군인이면 좋다는 것을 어째서 몰랐겠는가? 그러나, 군인들은 다만, 늙은 신호수 새끼처럼, 다만 청양 고추 농사나 짓는 허튼 소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이상은 좋아하지만, 현실을 꺼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숫자일 것이다. 암사자도 됐다가, 전화하면 찍 싸는, 푸틴도 됐다가, 숫사자로 되고 싶은 마음이 한결같은, 유승준도 됐다가, 정말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들을 가리켜, 사람들이 바라보는 숫자라고 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무서운 개새끼들이 되고 싶은데, 마침내 이세벨이 변신의 방법으로 취한 것이, 차원을 떨어지는 것으로, 뚫어서, 그 시절에는 솟을 수가 없으니, 개들에게 먹혀서, 그들처럼 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예후가 그런 사람을 본 것이다 할 수도 있고, 안 한 것이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후가 이세벨이 그렇게 뼈만 남는 것으로 변신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것처럼, 삼국지의 어떤 내용들이 그랬다는데,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부진 말만 하더라도, 실은 못지않게 티비 같고, 종말의 때에 마침내 티비의 한 복판에 등장해서, 춤추고, 지랄 장광철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분석적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임마누엘 칸트처럼 종합적인 말을 해야 하는지, 우리로서는 전자를 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시련이 다 지난 뒤에, 종합적인 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또한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찌 과정이 없이 결과만을 보고 좋아하고, 승복하고, 오직 결과만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겠는가? 분석적인 말을 해야, 그런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의 종합적인 말을 거기에 의지해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종합적인 말을 해도, 불쌍하며, 분석적인 말을 하면, 조금 늦게 불쌍해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고, 저마다의 은밀한 노하우를 갖고, 주어진 시간에, 잘 사는 것이 최선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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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화인의 극치에 이르는 것이, 모든 문학가들의 필연이라고 하면, 어느 누가 문학가가 되겠는가? 되려고 하겠는가? 조용한 가운데, 숫자를 셈하는, 경영과나, 경제과나 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업을 펼치는 것이 누군가의 개인적인 의지 같은 것으로 된다면, 반드시 자기가 그런 사람이다 자처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너무 겸손하는 문화가 팽배하면, 잡지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좋지 않고, 그러나 비문학적 인간 근원의 폭로에, 그와 같은 목적에로의 맹렬한 질주로만 이뤄지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왕이 같은 것들이 자기가, 푸틴 같은 것들이, 자기가 무기를 한국에 수출해서, 어떻게 차관을 갚아서, 한국이, 뭐 어떻게, 그렇게 해서 중국이 뭐 어떻게, 그런 망상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결국 주자는, 인간의 비문학적 근원의 폭로를 위해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사람 말을 하는, 전화 통화를 하는, 그래서 명령이 떨어지면 찍 싸는, 주자의 문학적인 나름 하소연을 별로 모르는 척하는 것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을 하다가, 우리는 얼른 발을 빼야 하는 것이다. 레인에 있다가, 얼른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처음부터, 고대 노예들에 의해 집필된 것일 수 있다. 노예는 말이 없다. 노예들의 의해 쓰여진 글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헤겔의 변증법적인 것이다. 자유의 지수가 굉장히 높은 것이 있고, 그렇다면, 도저히 주자가, 필자가 자유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자유의 지수가 굉장히 낮은, 그런 분석적인 글들이 생각보다 많이 집필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나, 필자, 주자가 살인까지 저지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드라마를 만드는데, 극중에서 자기들이 죽는 이유는, 주자의 상태가 너무 힘들고, 다른 아닌 자기들이, 이야기의 오랜 습관이나, 상상의 범주, 인과의 관계가, 적들을 물리쳤던 오우삼의 분신들의, 적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더럽고, 치졸한데, 주자는 넉넉하게 잘 산다 싶으면, 자기들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상 이변이 그들을 편안한 대로 유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폭풍만 불었다 하면, 사람들이 평범하게 일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만 내렸다 하면, 눈이 빠지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비는 얼마나 생각보다 자주 내리는가? 그리고 장마 기간에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한화인이 있다 없다 논쟁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커먼 센스, 그러니까 검은 센스가 아니라, 상식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 정도는 아니다, 위화도 회군을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도대체 위화도 회군은 뜻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비만 내렸다 하면, 살인하고, 비만 내렸다 하면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옛날에는, 지금의 조개무지처럼 많았다고 한다. 제발. 이제는 조개사. 조개종.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에서는 살지 않기로 하자. 정토종도 이제는 조금씩 그렇게 여겨진다. 불교는 아무런 문학이 없고, 호롱불에 지 손가락이나 지지는 것들의 모임 같다.
사람은 문학이 하찮기 때문에, 예를 들면, 허난설헌의 규원가 같은, 차라리 그런 기행과 하늘의 한화인들을 높게 여기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자기가 베놈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실제로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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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아름답다. 문학은 폭발 액션,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꼭 보고 싶으면, 꽃을 보면 된다. 화려한 액션 같은 것이 보고 싶으면, 돼지 같은 마누라와 남몰래 바닷가 낭떠러지 안쪽에서 말을 달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문학은 표현이 금기시되어 있다. 문학은 그와 같은 테두리 안쪽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와 같은 문학을 무시해서, 일종의 키움 증권 같은, 그렇게 나타나는 유사 문학가와 유사 학생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탄의 것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무분별한 상태에서, 삼국유사가 그런 유사 문학가들의 은밀한 모임 같은 것이냐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특수 주사기를 쏘아본 적이 없다. 나의 글에는 자주 나타나는 고발이고, 정부 고발 문서 같은 것이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죽으면서 아들이나 손주에게, 아반떼 n을 그렇게 타고 싶었다고, 자기 드림 카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런 식의 유언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특수 주사기인 것이다. 우리가 독도를 보면 특수 주사기인 것 같아도, 그것의 바닷가 내부의 모습이, 후지산을 보면, 일본 사람과 닮지 않고, 일본 사람이 좋아할 만한 특수 주사기인 것이 엿보이는 것이다. 한국 주사기가 한국 주사기이고, 후지산이 특수 주사기이면, 전쟁이란 그렇게 우리나라 전국에 심심치 않게 산재해 있는, 삼각산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문열이......
그렇다면 우리는 정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문학을 좋아할 만한 인격인가 하고 말이다. 내가 검은 태양에 관해 글을 쓸 것이 있다고 하니까, 전화기 상에서, 러시아 한화인적인 자부심이 넘치는 새끼가 웃는 것이었다. 우리는 문학을 좋아할 만한 인격이 아니다. 문학을 할 만한 인격도 아닌 것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크리스테바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고, 롤랑 바르트의, 그런 식의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그들에게 식감이 떨어지고, 자기들에게는 출판사가 있고, 내게는 전화기 상에서 살인자처럼 웃는 새끼만 있다는 것의 차이가 별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에는, 우리들의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미각은 한계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돈까스를 좋아하다가, 김치를 먹고 똥을 쌀 것 같은 압박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김치를 계속 먹는 것은,
후기 구조주의적 문예 철학이 무엇인지 하나도 몰라도 그러는 것이다......
우리들의 집은, 모네의 쓰나미, 불쌍한 집들 같고,
공부를 했고, 잠을 잤고, 했다지만, 일종의 성경 속의 올림픽처럼, 선한 사람 열 사람을 남기기 위한 투쟁에서 지속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의 안타까움 같아지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티비라도 보았던, 엔니오 음악처럼, 깊은 선율, 일본인 줄리아 크리스테바 마저도, 선수는 하나도 없는 나의 주장에 동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기로에, 광양 항구 사람들 전체가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망설이는 것은, 그것이 과연 어느 것에까지 이르러서야, 반환점을 돌 수 있는지 헤아려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규원가는 그렇게 슬플 수 없다.
허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동차의 경쟁이나, 탱크들 간의 전투에서 죽은 것 같다. 무슨 영웅적인 전과를 올린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처음 먼저 깨지는 것들이 항상 있는데, 그들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객사했다는 비유는 나름 전통적인 해석에서, 올가미가 벗겨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규원가에서, 허난설헌이 까마귀처럼, 자기 남동생을 보고 싶고, 자기 남동생이랑 자고 싶고 그렇다 하는 것은, 다만 우리들의 검은 태양일 수 있는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누구와 자고 싶었던 것일까? 너무 객사하고, 항상 객사하다 보면, 우리가 불교의 영생이나 환생,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자기 남동생을 원래 사랑했던 사람, 혹은 전 남편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너무 자주 죽고, 항상 죽고 하다 보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횟수만큼, 자지가 북한의 식량난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쏟아진다면, 어떻겠는가? 좋겠는가? 정말 좋겠는가? 자기가 항상 교통사고로 죽어, 자기의 생체가, 기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되어, 그들이 저녁에 혹은 아침에 산다면, 이제 그만 남동생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검은 태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속성만 남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것을 허난설헌이 맹숭맹숭한 조선의 시대에서, 경험하고, 상상한 것이면, 시대를 앞서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이래 봤자, 늘 이렇게, 겉모습은 새하얀 화선지 같으나, 희탄 같고, 사탄 같고, 검은 재와 같고, 거기다 누는 여자들의 오줌 같고 그렇다......
그러니 사람들을 문학으로 유혹하고, 그것을 다만 오늘도 부족한 한화인 한 명을 선발하는 교육 과정으로 삼는다면, 에너지 낭비가 하나도 없는, 정말이지 꽉 찬, 살아있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의 워킹 딕셔너리 하는 것처럼, 워킹 세계사가 되는 것일 것이다. 최근에, 규원가를 다시 읽고, 우리가 어렸을 때는 문학으로 유혹되어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보니까 웅장하고? 참으로 위력적인 참 bitch
아프리칸 마구로
그렇게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