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름다운 우리 유키 구라모토: 세 만두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21. 12. 23.

아름다운 우리 유키 구라모토: 세 만두에 관하여

 

 

 

 

 

 

 

 

 

 

 

우리는 반드시 피아노를 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듣기만 해도, 직성이 풀리는, 그런 직성 민족이다. 무엇이 우리를 직성하게 만드는가? 견우와 직녀로 만드는가? 그것은 관상인가? 아니면 관상이 아닌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깡패도, 자기를 향해 누군가 껌을 씹고 있으면, 가서, 어떤 문화방송인지, 아니면 도깨비, 케이비에스인지, 관심을 갖게 되어 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면, 때리는 것은, 일단 사람이 있고, 그의 자식 같은 말이 있고, 그런 것을 확인한 다음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깡패가 되는 것을 때로는 내심 선호했다가, 그만두는 것은, 다만 만두 때문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있고, 그의 자식 같은 말이 있는 것이다. 만일 정치인 윤석열에게, 그 두려운 공부 시절, 그리고 법조개 시절, 그래도 읽은 책이 있다면, 자기에게 없는 어떤 사람들과, 자기에게 뭐라고 껌 씹는 사람들을,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성경 말씀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어떤 시장의 우상,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뭐 그런 사람 인물, 그리고 이름의 우상을 가질 만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우상을 좋아하는 것은, 우상을 자신처럼 섬겨서가 아닌 것이다. 부족해도, 뭔가 많이 부족해도, 심지어는 부족한 것만 있어도, 대상이 있다는 반가움에서 그러한 것인 것이다. 윤석열의 말을 보면, 서양에서는 도무지 통용되지 못하는, 그런 일본 정치인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서양의 우상을 좋아하는 것은, 서양도, 동양도, 통용이 되는 것 같은 서양 팝송 같기 때문인 것이다. 캐럴 송 같은 것. 우리가 일본의 목구멍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다만 존재를 무시하는 잔인함이나, 섬뜩함, 그리고 일방함 때문은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여유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을 저렇게 해놓았는데, 어떤 만두를 말하는 것인지, 그만 까먹고 말았다.

 

 

윤석열이 저렇게 생겨도, 서양에서 동양으로 오는 문학을 선호하지 않고, 손님 대접을 잘하고, 동양에서 서양으로 가는 문학을 선호하였다면, 얼마나 좋은 자식들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말들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의 부자론은, 이번에 개봉한 매트릭스 사편과 돼지코 콘센트가 그렇게 맞는 것 같다. 부자에 대한 논지는, 세상 어떠한 여학생도 가질만한 것이어서, 금방 매트릭스의 유명한 화면 보호기의 옷을 입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금 접한, 민주화 운동권의 서양 추수주의 같은 것은, 저의기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마리오네트 조정하는 것들이, 금방 메트릭스의 수신기 이어폰을, 폭발시키는 것 같았던 것이다. 여자에서 악질로. 그것은 프롬 투 홧의 유명한 영어 문법처럼, 사람을 그만 대마도로 보내는 일인 것이다. 어째서 생긴 것은 몽골리안 관상가 양반 내가 대통령이 될 상인가처럼 생긴 양반이, 하는 말마다 그렇게, 동양에서 서양으로 갈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정신의 말만 그렇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잘 보인다 하겠다. 그렇게 밖에 말을 하지 못할 운명인 것이다. 얼마나 사람들의 범주는 구멍 같은 것인지 모른다. 농부를 정치인 후보를 시킬 수는 있으나, 대통령 후보를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밥 먹는 힘이, 반드시 가장 높은 존재의 힘에서 기인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만 공단 뚫린 입들도, 그렇다고들 내가 말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아이들 키우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잘 살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모든 법조인, 그리고 법조개, 어떤 거류민단, 친목단체, 등산회, 산악회, 송어회 같은 것들을 좋아했던 것은,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과, 어려움과, 민주주의라는 막연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몸으로 희생하니, 그 말이 그렇게 청바지 같고, 어려움에서 어려움으로, 그것을 감당하는 문학가나, 법조개 사람들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무슨 기저질환 같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자지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사람의 말이 사탄에게 그렇게 능숙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을 그렇게 규탄했던 것도, 농부가, 밭에서 일하고 집에 와 보니, 마음이 난장판인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참지 못하고, 어부도, 산부도, 산부인과 사람들도, 겨우 한자를 읽고, 신문을 읽고 했던 학생들도, 한자를 어느 정도까지 읽는지 서로 쉬쉬했던 사람들도, 민주주의와 분업을 하고 있다는 기저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에 분을 품고,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을 보면, 조선시대 왕을 향한, 간신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왕이란 무엇인가? 중국 왕이 그런 이상한 이름의 유명인이 아니라, 조선의 왕이란, 윤석열의 망변처럼, 존재의 존재 같은, 늘 이상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궁녀란 또 무엇인가? 궁녀는 또한 화랑이었을까? 우리는 그와 같은 화랑길을 가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등급이고, 그것은 특수함이다. 우리가 사물에게서 만족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좋은 말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일 것이다. 우리가 망변을 싫어하는 것은, 이것은 책임도, 보호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어지러운, 자기는 유물론이라고 했다가, 자기는 대통령 후보라고 했다가, 자기는 여기저기 방문한다고 했다가, 자기는 정해진 룰에서만 말한다고 했다가, 그런데도 가족이 있다고 하고, 그렇다면 그런 거친 가족에게서는, 화목제로 죽는 아이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목제라는 말이, 과연 그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이 망발은, 거짐 화목제 수준의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Paris in winter

 

유물론이라고 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