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창옥과 하얼빈

by 마음대로다 2024. 12. 26.




김창옥의 언변은 진정 아까운 데가 있다. 아쉬움은 없다. 이런저런 핑계도 없고, 다만 유인촌만 같다. 그가 환생한 박수근이어서, 대학로에서, 신생 여배우들을 사귀면서, 적당한 청춘 드라마, 대학 드라마를 찍으면서, 사생결단, 살신성인, 인간시장, 그런 마음가짐으로 상대에게 종말론적인 휴머니즘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신라호텔, 워커힐호텔, 마리나호텔, 호텔들을 전전하면서, 이제는 여자 쪽에서도 남자가 화가가 될른지, 아니면 시인이 될른지, 연설가, 발성가, 혹은 새로운 세종대왕의 얼굴가죽을 될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울에서, 숱한 호텔의 높이에서,  그래도 우리는 가타부타, 쿤테킨테, 그것을 두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잔잔한 정치행위이고, 잔잔한, 잔다르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여자들은 대게, 옷감만 알고, 피아노만 칠 줄 알고, 한국어를 유인촌만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한번 사탄과 결탁되었다고, 버림을 받기가 뭐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피곤이고, 일종의 타이어 같은 것이다. 타이어드니스.....

대학은 바로 그와 같은 나무에서 자랄 때가 많다. 교수도 그렇고, 부교수도 그렇고, 조교수도, 시간강사도 그렇다. 그들은 사실, 자기를 말하는지, 아니면 학과적 비밀을 말하는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남자 주인공을 모르겠는데, 이름을, 그것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반복되고, 그것은 자행되며, 그것은 연속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콜라쥬처럼 서로 붙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대학상이고, 남성상이다.

그것은 한국어의 가능성에 닿아 있고, 뭔가 서로 보이는 거리에 있다. 한국어의 가능성은 유인원의 특수훈련 같은 사지선다에서 모두 동이 나고 만다. 그런 사실을 안다면 김창옥은, 세상 모든 김창옥들 중에 으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항상 김창옥을 보면서, 사람들은 내가 여자들을 만나서, 그럴 것 같은 패턴을 먼저 하고 있는 것일 수 있겠다, 지레짐작을 한다. 지네짐작. 인기 음식점의 신발들 같은. 지금은 잘 정리한다는...

그러나 심각한 것은, 김창옥들끼리도 수준차가, 수춘도가 엄청나서, 중국, 그 중에는 사기꾼들도 많다는 것을, 영국 소설의 탄생을 비단뱀처럼 거론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기꾼처럼 있다가, 다시금 한국어의 가능성이 되는, 소나무는 아니지만 그것의 군락지에, 자기도 소나무처럼 있을 수 있는, 그런 숱한 티비 패널들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김창옥처럼 가능성으로 있다가, 사기꾼이 되는, 갑작스러운 사태를 좋아하겠는가? 그와 같은 섬세한 드라마를 우리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이문열이 강풀이 되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정도는 서울에서 괜찮지 않느냐고 한다. 목사들은 이미 자코뱅당처럼 없는 것으로 한다.

영화 하얼빈은 그런 서울의 사람 없음 속에서, 오직 가능성만으로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의 응축된, 흑염소 육골즙 같은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들은 실질로, 김창옥 같은 사람도 되지 못하는 한국 남자들인 것이다. 다만 상상으로는, 영화 찍을 수 있고, 알함부라의 궁전이라든지, 프리스트라든지, 그런 것을 찍을 수 있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일종의 타스만, 그러니까 의타기인 것이다. 의타기는 파는 사람도 의타기가 자기 것이 아니고, 독립 정신이 아니며, 그것을 사는 사람도, 정작 호주 타스만에서 농장을 운영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된다. 그것을 유튜브 찍을 수 있는 분량만큼만, 한국어가 가능성을 넓힌 것일 것이다. 그러니 정작 한국 사람들은 많이 일본 사람들처럼 되고 말았지 않았겠는가? 마치 그와 같은 타스만처럼, 강력한 외모의, 너무 타스만 타스만 하는 것인지 모르나, 하얼빈이 나온 것 같은 느낌이 계속 있다..

그런 남자상은 슬픈 것이다.

그런 다윗상이 어째서 서울 하얼빈에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