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프리오리. 맞는 말이기도 하고, 그른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 문화나 한국 문화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전통차의 느낌과, 어떤 코피의 느낌이 있다. 그것이 갈리거나, 하나가 되거나, 거기서도 맞는 느낌이 있고, 틀린 느낌이 있다. 선생이 학교에 새로 부임을 했는데, 너무 느낌으로만 가르칠 수가 있다. 어느 때는 아프리카를 비난하다가, 월레 소잉카, 어느 때는 아프리카를 찬양하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 그런 단순 색감 하나 정의 내리지 못하고, 옷장에 정리하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 그것은 은밀한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식으로 힘을 얻는 공간이기도 하고, 솔직함으로 힘을 잃는 자리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죽을 때, 대게 힘을 잃는다. 내내 잃었다가, 일어, 잃어, 일어나, 마지막으로 잃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알고 모름으로 인해서, 앓고, 모름으로 인해서, 그것을 학문 모든 것을 떠난, 순수한 인의 차원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신학으로, 아니면 문학으로, 아니면 이 죽일 놈의 사랑, 철학으로 놓아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지를 주고 떠난다. 그것은 반복되고, 그것은 어쩌면 광주사태 같다. 우리는 방황하고, 코피가 언제 가장 맛있었는지 생각하다가, 그것의 코피이즘, 누군가의 이름으로서의 코피 아난, 나중에는 습관처럼, 좋은 버릇처럼, 때로는 나쁜 버릇처럼, 코피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한국 문화, 특별히 영화와 드라마의 아프리오리가 그렇게 아름답고 강력하다. 우리는 아프리오리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계급, 지식, 재산, 그리고 국가별로 차이가 극심한 꼰대, 문화, 영화, 영화 평론, 문학 평론이 있대도, 서로 만나고, 서로의 장점을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가인과 아벨처럼, 혼돈과 그의 친구들처럼, 치우와 황제처럼,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치우와 황제는 친구였던 것이다. 둘은 처음에는 서로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없는 친구, 그래서 이름이 치우이고, 그래서 이름이 황제이고, 그래서 이름이 천은과 화엄인 것이다. 둘은 매우 가깝다. 그러나 한 사람은 스피노자가 되고, 한 사람은 헤겔이 된다. 광주사태는 지금의 부산처럼, 어쩌면 치우천왕이 들고일어난 것에 대한, 음각화였을 수 있다. 우리가 미국 영화와 팝송, 그리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 그것들을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은, 황제마저 위협할 수 있는 치우의 아프리오리가 있어서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아프리오리는, 슬프고, 안타깝고, 보다 특수한, 힘이 매우 많이 드는, 오직 북한 친구들이나 갖게 만든다. 그 말들을 요즘 유행대로 줄이면, 오북친, 다른 말로 하면 꼬북칩이 되는 것이다.
학교의 아프리오리가 사라지는 때가 도래하고 만다. 그래서 그것의 문화가, 아무런 아프리오리도 없는 대중들 앞에 나타나, 그러니까 나무가 찍히고, 그루터기만 남았는데, 그와 같이 삼만 그루, 그러나 그런 줄을 모르고, 아직도 찍힌 줄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다가,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포스테리오리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아프리오리 전쟁에서, 매우 참패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치우와 황제가, 아직 그 단어가 구분되기 전의, 행복한 지식의 아프리오리로 살아갈 때를, 문득 기억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정답고, 환하고, 소망 헬멧, 그와 같은 소망 헬멧으로 가득했던 때이다. 소망 교회.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의 집단적인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문화, 교회, 학교, 학원, 노량진, 음악 학원, 연기 학원, 금호, 옥수, 한강 라면, 대한 극장, 쉬리, 안 쉬리, 놀리, 야놀자, 교보문고, 서울대학교, 그런 것들이 잘못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서, 실제로 모래시계네, 아니네, 다모네, 아네모네, 그런 것들을 실질로, 구로 디지털,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프리오리라는 단어를 갖고, 접하고, 우리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 깊이 회의하고, 탐구하고, 스스로 조사하고, 그러나 맞는 해석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칸트나 읽고, 대수와 대수가 만나, 존재의 대리 시민들의 대리 운전이나 하는 길을 갔던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숱한 아프리오리들을 저장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보면서, 찬송하면서, 관철, 단수, 숱한 아프리오리들을, 가능태들을 축적하면서, 마침내 티비에서 외국 여자가 아닌, 한국 여자들을 사랑의 이상형으로 삼아, 아프리오리를 챙기고, 또한 클러치 된 속도의 아프리오리들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순천 드라마 세트장, 영화 신세계의 계단 안에서, 이베포레이션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가, 그런 단계론적 교육론으로서의 철학을 담고 있었을 수 있다.
주인공 오대수는 숱한 아프리오리들 사이에서, 분투하다가, 가상 기억을 이식받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애초부터, 그와 같은 사람의 산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철학을 무서워하는 것은, 서양이 그것을 따로 쟁이고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모든 아프리오리는 충분히 아포스테리오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욕을 싫어하고, 화를 싫어하고, 붕 뜬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주 예민하게 겨우, 아주 겨우 연결하고 있던, 교육과 신학의 아프리오리가, 그것들을 보고 나면, 경험하고 나면, 가볍게 절단이 나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에게 딸이 죽었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보니, 산 것이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인생의 그림 자체가,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티비를 아주 재밌게 볼 때처럼, 인간의 매우 심각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전주를 좋아하고, 후주, 또는 간주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죽었기 때문인 것이고, 나중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며, 먼저도 재밌게 살았으니, 틈틈이 반드시 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고, 이미 죽었으나,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 것이다. 그와 같은 표현은 철학이기보다는, 수사학에 가깝고, 수사학이기보다는, 사탄에 그만큼 솔직한 표현은 수사학에 실재로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학이 되는 것이다. 복음서의 숱한 병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병, 그래서 담긴 것을 알 수 없거나, 겨우 알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인 것이다. 어렸을 때는, 속병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전염병 같은 것이 창궐한 것인가, 허준,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선죽과 후죽, 후죽교, 그런 나이 든 이들과의 대화를 나누고, 지켜보다 보면, 다만 병에 걸린 채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슬픈 존재, 그것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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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오리.....
거대
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