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안전하게 타기 위한 에이비씨디가 있는가?
이시영 복싱대회 우승의 신문 기사를 읽는, 뉴스 페이퍼는. 누가 주어인지 모르는 불국사 툭하면 다보탑의 다각형 지붕의 사연들. 나는 그것을 찻집으로 명명했으나, 사람들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시영은, 바로 이와 같은 문장적 난황, 그것의 면벽 수행을 통해, 일정 정도 나에게 동조 혹은 동의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대림 메시지만은 아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에이도스 훈련을 받아서, 매우 적절한 시기에, 정확하게 메시지를 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의 절반을 던져 내게 다시 그 무엇을 주는, 반려자 급이 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럽다. 내가 대림 메시지를 사랑하지 않다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메시지가 지나가면 메시지만 본다. 그러나 메시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시영은 그와 같은 스페이스, 정확한 모눈종이 같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메시지를 타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은 그와 같은 선동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물론, 자기는 잘 모른다. 그 대신 엑스제이알 천삼백을 타자 한다. 내가 있는 석가탑 차고와 다보탑 개인 찻집에 올라, 엑스제이알 천삼백을 자기 가진 돈의 절반을 아낌 없이 들여 사들고 오면서, 타자, 안타? 타든 안타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놔두고 갈게 하는, 불교적 용어로 집착이 없는...... 대체 오토바이가 무엇인가? 그 사진은 흰 종이 위에 붙여지고, 나는 그것의 왈가왈부를 분석하면서, 분석적으로가 아니라 그래도 종합적으로 말을 만들어간다. 그대, 사리자여, 우리는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 나는 다음 말을 적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토바이 안전하게 타는 에이비씨디가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사람이 만심으로 가득차서 선을 행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가진 최고의 감각이 나오기 때문에, 생각보다 사고 확률이 없다. 그것은 죽기까지 만나지 못하는 지구 붕괴와 맞먹는다. 지구 붕괴가 먼저인가? 나의 죽음이 먼저인가? 불교는 나의 죽음이 먼저라는 것을 가르친다. 대신에 그 둘이 만나는 자리를 유마의 지혜로 놓는다. 바람은 선선하며, 건축은 언제나처럼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늘 들어가 살지만, 사람들은 불국사의 계단을 감각적으로나 남 보지 않을 때 오를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죽음은, 코와 같고, 봉긋한 가슴과 같고, 남자의 문제적 부분과 같다. 뒤를 보는 경우란, 자기가 자기 목을 돌려도 볼 수가 없다. 등이 가려운 것은, 하나님의 지혜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도구적으로 해결한다. 앞은 생각보다 끝이 없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등 좀 긁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뒤로 나아가는 말은 본적이 없다. 그 흔한 왜구가 침략해오는데, 봉화도 올리고, 파발도 돌리는데, 파발마가 봉화대를 지나, 바닷가에 도달한 왜구를 지나쳐, 뒤로뒤로, 헤엄을 쳐서, 왜구들의 본산에 가서, 지금 왜구가 침략해 온다고 하는 장계를 올리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는 이유는, 실은 자동차가 후진을 할 수 있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너무 앞만. 철저하게 우리들의 실질적인 경험의 경계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뒤로 갈 때는, 올라타서, 두 발로 이상하게 노를 저어야 하며, 선 채로 무거운 것을 어렵게 뒤로 끌어야 한다. 오직 나아가는 것으로만 있고, 다른 가능성은 일절 제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를 모두 적고, 우표를 붙이고, 까마귀에게 그것을 물게 한 뒤에, 이시영에게 보내는 것이다. 내용은 덧붙여 있다. 인터넷은 소중한 정보이다. 실은 앞뒤트넷과 같다. 멋지다. 가꼬이. 가와이.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대림 메시지를 탈 바에는, 차라리 옆 사람에게 대상을 조금 까고, 여자가 밥만 하면 됐지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엑스제이알 천삼백 타자. 응. 이시영의 음색은 아름답고, 묘하게 정토종 같다. 풍단이 몇 점인지 이제는 잊었지만, 인간이 그렇지 못하는 것의 이유가 모두 적힌 것이 도리어 아름다운 그것이 아닐까 한다. 서양의 메트로폴리스, 그 대단한 철학은, 지연과 차연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옛날의 말바우시장을 내가 기억하는 것마냥, 불교의 禪이 된다.
아리스티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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