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던 어제의 개과천선.......
어제 것만 보면, 우리나라는 초유의 빌딩 국가이며, 가난한 어부는 어딘가에 있대도, 동원되는 것 같고, 여자들은 집에 비싼 파티복이 두 벌 쯤 있고, 남자들은 다 말 잘하고, 이기심도 있고, 이타심도 있고, 번민하는 장년도 있고, 동료들이 많고, 외국에도 관심이 많은 것처럼 여겨진다. 차는 혼다 차를 좋아하고, 법률적인 구속성이 남다른 것처럼 보여진다.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 아니다. 빌딩에서 계속 살라 하면,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은 행복이 있고, 적성이 넘치며, 삶의 보상이 넉넉한 곳이다. 빌딩이 좋은 것은, 뷰가 남다르다는 것이고, 풍수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일 것이다. 뷰가 남다르고, 풍수해로부터 자유로운 강력한 집을 시골에다 지으면, 우리는 초고층 빌딩의 속성이 무엇인지 그때부터 헷갈리게 된다. 사람들은 정신이 책상 같고, 비치된 백과사전 같고 했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유물론이다. 우리는 유물론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 한국에서는 네이버를 통해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비싼 백과사전의 내용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숱한 난관은 있다. 저녁에 술약속이 있고, 낮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며, 막상 집에서는 데스크탑을 오직 게임으로만 운동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네이버에 갖다놔도 사람들이 지식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카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검색하지 않겠는가? 기다리다가. 거기서 기다리다가. 극장에서 영화를 기다리다가. 비로자나불이 뭔지, 반야심경이 무엇인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초록의 전쟁터에 있고, 다움은 산뜻한 오방색이지만, 우리는 철모를 쓰고는 진리가 어떠한 단어와 가장 가까운지를 검색하고는 죽는 것일 수 있다. 얼마나 그것이 안타까웠으면 사도 바울이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이는 우리들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겠는가?
사람이 정신의 길이 없는 것 같은가? 사람의 정신의 길이 반드시 유물론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만 반복되겠는가? 뭔가를 저녁에는 유물론자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지 않겠는가? 유물론자는 물론, 유물,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문법이고, 그것이 그들의 진리이며, 그것이 그들이 오모시로이를 채우는 방책인 것이다. 만일 어려서부터 좋은 부모님 아래, 적어도 예술지상주의의 이념을 배웠다면, 부모님을 기리고, 자기의 관심을 높이며, 세속 직업과 지성소 같은 예술 공간의 매개의 일을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고 하면, 그것은 늘 언제나 이미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이 차를 떼거지로 산으로부터 쏟아지듯이 타고 다니니까, 어린 사람들도 세단을 좋아하고, 준중형차를 좋아하고, 제네시스 신차라고 좋아하고, 케이쓰리, 케이파이브 케이나인 등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의 간격. 아버지가 법조인인데, 조인전대, 아들이 목사님이 될 확률. 사람들은 갈등이 없다 하겠으나, 전문가의 눈에는 갈등만 비친다. 예수님이건, 사도 바울이건 대놓고 경멸하시고, 사도 바울은 집에 가라고 하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 바깥에서 보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서초 국립 도서관과 이런저런 건물들이 한 서초구에 있다. 거기에 이번에는 사랑의 교회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우리 서초구는 각종 인종들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나는 도봉구와 친하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쪽 정치인들의 구민들에 대한 메일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 내가 도봉구와 친한 이유는, 서울에서 버림을 받고, 이처럼 거대한 문명인인데도, 시내에 따뜻한 사무실 하나 없이, 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보면 열심으로 일을 해서 사무실 하나 갖는 것도 어려운 처지에, 나처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허구한 날 여학생의 볼기짝이나 친 것 같은 사람이 욕심만 욕심만 그리 갖는 것은 동방불패 언어도단인 것이다. 아무튼 책을 한 권 고르고, 서해의 어느 무인도 같은, 거기서 죽을 것 같은 몇 페이지를 거들떠 보다가, 시내버스로, 혹은 지하철로 도봉구로 귀환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처럼 숱하게 행했기 때문에, 나는 도봉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근처의 식당과, 저 아랫 쪽의 그러니까 지하철 역 근처의 식당가가 또 분위기가 다르다. 나는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스트레이트로 학교에만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사역하는 시간에, 혼자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면서 점심을 먹으러 가곤 하였다. 처음에 한 번 먹은 사천짜장이 너무나 맛이 있었고, 신의주 순대국밥이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았다. 몇 번을 신의주를 가는 것처럼 걸어서 먹으러 갔다. 그리고 식당이 작은 곳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서부터는 맛이 떨어졌다. 두 번 더 가다가, 그만두었다. 그만두는 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만두 두 개를 준다. 서울 사람들이 서울을 높이 보다가, 경기도를 낮추어보다가, 자동차를 타고 가서 제천의 의림지에서, 부산의 태종대에서 굴욕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계급 의식 없이, 버티고, 영어로 현기증, 공부로 자기를 채찍질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난 새가 스타벅스를 마신다는 것처럼 오직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단련하기란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울은 코너코너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유물론자들을 계속해서 폭풍흡입해야 하고, 목사님의 설교가 설익은 것인지, 비린내가 나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신심으로 그렇게 답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이 고작해야 계급 의식의 지배 아래 있다면, 서울대 문학과 사람들의 게오르규 루카치 소설론의 연구 모임으로부터 경멸을 받게 되어 있다. 모든 사물은 핀잔이다. 그러나, 핀잔의 동굴처럼, 사람이 얼굴을 보이고, 그것의 어쩔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행하면, 우리는 백짓장을 맞드는 처지이기 때문에 참고 들을 수가 있다. 교수는 늘 언제나 학생을 하대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교수가 가르치는 것 없이 핀잔만 일삼는다고 하면, 어느 날은 자지가 떨어지고, 당대비평 여학생의 옷을 입고는 교수가 들어올 때까지 한정 없이 기다리는 한국 대학사에서 존재론적으로 일찌기 없었던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은 빵봉지까지 핥아먹다가, 도저히 배가 고파서 강의실에서 시위를 풀고 나왔다고 한다.
캠퍼스는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달라 보이지만, 그와 같은 퍼포먼스로 달리 보인다는 것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죽을 것처럼, 오바이트 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비린내 나는 구멍으로 통과시키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이 무슨 거대한 오페라 한 편을 본 것 같으나, 그 시간에 공부하고, 책 읽고, 음악 듣고, 한양대와 한양여전을 통틀어 십 걸 안에 드는 예쁜 여학생과 사귀기로 약속한 다음 날과 비교해서 무슨 경쟁력이 있겠는가 싶다.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국가는. 우리들의 흙은. 우리들의 평야는. 우리들의 저녁에는 검은 질주는......
또다시 이름의 망령을 불러보자면, 이것은 마치 무협영화 서검은구록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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