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학은 어디에서부터 가와사키 제이알엑스천이백을 놓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 두 대 들어왔다고, 호사가들에게는 잔잔한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이 장작 하나를 들고와서, 가락국수 비빔국수 어묵 삶은 계란 등을 맛있게 해주는 포장마차에서, 난로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숨가쁘게 엠티공구를 구하고, 공칠이 좋다고 하고, 티맥스를 예찬하고 한다. 그러나, 조금만 돌이켜보자. 제이알엑스천이백. 그것이 어디쯤에서 참 마음에 드는 여자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하늘을 드리우는 것일까? 일본 여자와 사귀게 되었다면, 대화에 장애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둘은 저마다의 한국식 애교로, 일본식 애교로, 현해탄을 거뜬히 건널 수 있다. 미국 여자와 사귀게 되었다고 하자. 그와 같은 상상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 그들의 공동체적 무의식은 동양인을 향해서는 계급 의식을 일이분수 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우리 사는 세상에 갈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이알엑스천이백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빅네이키드이다. 그것은 혼다가 겨우 버티고, 야마하가 따라가고, 스즈키의 주종목이 아닌 상태에서, 오직 그것만이 조선통신사로 와서 일본에서 데릴사위로 눌러 앉은, 남자라면 가와사키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가와사키 제이알엑스천이백 누군가 호명하기를 다에그라고 했는데, 헬라어로 무한이라고 한단다, 그것의 핵심이자 본질적 속성은 무엇일까? 한국 신학은, 신학생들의 저변은 어디에서부터, 그것의 본질을 놓치는 것일까? 무용? 천대? 압박? 엔터프라이즈? 과감함? 강력한 자기위주성. 인간의 말로 따로 표현되지 않는 가와사키성? 아무튼 내가 그것을 놓치고 있다고 하고, 그것이 제이알엑스천이백이라니까, 다시금 화제거리 하나를 들고 와서 겨울 난로에 집어넣고는 궁금해 할 것이다.
그것은 팬시이다. 판타할 때, 팬시. 팬슬할 때 팬시. 팬티할 때 팬시. 영어로 fansy. 형용사형으로는 fansiful. 우리는 놀란다. 무슨 신학 공부에서 팬시가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냥 수많은 주석서를 사고, 그것을 읽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익히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호라. 보라. 그 이전이다..........
여자들의 뇌는 맨드라미 같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백합화라고 말할 수 있는, 릴리, 그것의 전기라는 뜻에서 릴리전은 사실 남자의 것이다. 여자들이 맨드라미 같은 뇌를 갖고, 투호를 많이 해야만, 궁중에서, 궁중체험이랍시고, 겨우 릴리 하나를 손에 쥘 수가 있다. 허비한 시간에 비해, 얻은 것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것의 고통과 비극을 어떻게 만회해줄 수가 없다. 다만 백합의 향이 인간이 직접 맡기에는 해롭다는 나도 전해들은 상식으로서 백합을 상처낼 수 있을 뿐이다. 백합은 흰 색의 면과 그것이 아닌 것으로서의 투명한 면, 물론 그것의 프레임은 인간에게서 나오고, 백합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꽃과 줄기와 잎이 앙상블을 이룬다. 남자와 훈련 받은 여자는 그것의 분절에 능숙하다. 책을 읽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치 대학교 안에, 오토바이 동아리가 있는 것처럼, 학기마다 필독서가 있어서, 그것을 마감하지 않으면 동아리에서 퇴출시키는 가혹한 룰이 있는 것처럼. 저번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고, 이번에는 소유냐 존재냐를 읽는 아름다운 고급 오피스텔에서의 블라인드. 사람이 책에 부채감을 느끼고, 내가 막강한 캠퍼스 벽돌들을 시편의 담넘 듯이 넘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나 들리는, 오케스트라 배중율로서의 화성은, 막판에 이르러, 가와사키, 기계장치의 하나님을 구하는 것에서 정신의 피크가 달성한다. 그것은 드뷔시의 라 메으. 회원으로 있는 여자가 작은 스쿠터를 타고 오고, 선라이즈 선셋, 혹은 레드썬, 혹은 예순, 혹은 개대여신, 그것이 국가의 보장자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위기 상황이라는 것은 어쩌면 창작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와 같은 막강한 팬시를 구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코란, 다시 말하면 꿈일 수가 있다. 졸업하고, 돈을 엄청 벌어도 마찬가지이다. 마담이 아니면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생체가 된 다음에는, 돈은 여자들의 맨드라미를 자기의 것으로 이전받는 관계의 기쁨과, 그들의 비좁은 상관관계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도모다치, 그것의 원거리에서의 드라마타이즈드 소사이어티에서나 만족의 마지막 해방구를 난쏘공하게 되는 것이다. 난쏘공은 스쿠터도 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경주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달리다가 갑자기, 인천이든 간에, 들어가고 싶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싶은 달콤한 커피숍. 그러니까 우리의 뇌는 송과선이 한국 사람이 아닌 아프리카 사람의 프로타고니스트를 필요로 할 때가 있고, 커피숍에 저당 시럽 잡히기도 하며, 한갖 공중에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공기 놀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의 체액이 전부 투표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쿠터도 될 수 없는 국정원의 저변이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는 불만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책은 이제 읽을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러니까 성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순수하고, 백합, 혹은 릴리, 치열하고, 서로 경주하고 했었으나, 그때 우리는 꽤 괜찮은 고전을 우리의 중요한 아이템으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카트, 그것의 가능성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죽의 장막과 철의 장막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불만이 그 시절의 냉혹한 사실처럼,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다만, 스쿠터를 타고, 담양을 지나고, 화순을 지나고, 베트남을 지나고, 펜실바니아를 지나고, 규수를 지나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노예 상태가 아닌 것으로다가 자극을 받는 것이다. 그것의 고깃점 같은 꼭지점은 정말이지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만 같다. 무슨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국 신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릴리 같은 라 메으에서의 트럼펫. 그것은 죽의 장막일까? 아니면 신현균의 아직 죽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팬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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