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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나는 츠케멘을 믿는다. 그들의 선한 서양 철학을 믿는다. 어제 하멜표류기 역사 프로그램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4. 11. 30.

나는 츠케멘을 믿는다. 그들의 선한 서양 철학을 믿는다. 어제 하멜표류기 역사 프로그램을 보고.......

 

 

 

 

 

 

 

 

 

한국에서 한국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다. 국문학이나 국사학 국악과를 다니면, 대학도 성균관대학이나 동국대학교를 다니면, 고속도로일 것이다. 중문학과나 중국학과를 다녀도, 한국으로, 알 수 없는 동일율적인 세계관으로 도차쿠하기가 쉽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일본은 동양의 파리이고, 동양의 베를린, 동양의 암스테르담, 동양의 후눌룰루이라고 말이다. 동양의 필리핀 마닐라, 동양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라고 하면, 갑자기 우리는 멍이 때리고, 수긍을 할지 부정을 할지 헷갈리게 츠케멘 된다. 라멘과 츠케멘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일본 라멘도, 츠케멘도 먹어본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던 선배와 서울 잠실에서 소바를 함께 먹었던 것이 일본 멘요리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삼단논법처럼, 짐작할 수가 있다. 하나는 라면을 내가 먹고 있다는 것이고, 츠케멘은 소바처럼 국물에 따로 찍어 먹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바에 속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라멘에 속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츠케멘. 이도저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국문학과를 나오고, 취직을 해서 친박 새정치국민회의 투표를 하고, 아이들을 취직시키면, 한국 사람이 혼또니 되는데, 거기다가 팔월의 크리스마스라던지, 또 다른 한국식 명작을 보고 비평도 없이 물에 빠져죽는다고 하면, 그는 한국 사람 중에 한국 사람이요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묘한 부끄러움이 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고, 빛과 같이, 섬광, 우리의 언어적 가능성을 가르치고, 그것의 풀섶들을 훼파한다. 우리가 톰보우를 썼을 때. 우리가 펜텔 샤프를 썼을 때......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사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멜 표류기처럼. 신학을 계속 공부하고, 막강하고, 육중한. 계속되는 은혜와 성령. 철학을 공부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는 히도이하게도 한국적이고,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플로티누스까지. 이런저런 신학대학이나 철학대학에 짱박혀 있는 사람의 멱살을 잡아 흔드는. 츠케멘의 몇 소절에서처럼 단호하게.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클래식을 마침내, 문장의 대위법으로다가 집어 올리기도 하고, 막대한 양을 버리기도 하고. 국문학을 사랑하면서,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영화를 계속 보고, 사진기도 a6000으로다가 새로 사는. 문학과 철학만 해도 내려오기가 힘든 판에, 그러면 그는 언제쯤 한국적 폐색점(pessimism)이 될 것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한국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카테고리도 없고, 포리너들에 대한 포비아도 없다. 둘다 성경 속에 깊이 박힌 문제들인데도 말이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 말씀으로 나아가고, 사랑의 문장들로 가득하니, 임뮨시스템이 서석대와 입석대처럼 막강한 것이다.

 

 

사람이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적 생산성이 없어도, 다만 한 사람으로서, 츠케멘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의 무한진행 같은 것이 일본과 화란의 무역이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화란은 당시에 영국보다 부강한 나라였다. 그 시절에는 그들이 메이져라고 자처할 수가 있었다. 동북아에서 일본이 메이져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개방성이라던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라던지, 번역의 내용까지를 모두 들추어보면, 그처럼 꽃이 피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싶다. 물론 사쿠라 꽃잎처럼 계속해서 피는 민족이긴 하다. 피고지고. 피고지고. 일본어적인 아타락시아. 유데모니아. 문제는 정신의 메이져가 어떻게 사람들을 계속해서, 태고부터, 짓눌러왔느냐는 것이다. 독일철학을 못하고, 오스트리아 음악 대학을 다녀오지 못하고, 영국 문학을 못하고, 이태리 의상 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프랑스 철학을 못하고, 다만 화란을 다녀와서, 화란어를 조금 하고, 그들의 반덴 부르크 종교학자의 저작을 연구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그 즉시로다가 사랑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 공부하고, 때로는 체코 출신 작가를 좋아하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좋아해도, 그와 같은 메이져를 전공한 사람보다 무등산과 같은 책이나, 영화, 소설 작품 같은 것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것이다. 메이져를 전공한다는 것은, 공허한 바보가 얼마든지 될 수가 있다. 그 안에서도 정반합이 끊임없이 반복되겠지만, 어째서 무수한 경제적 실질소를 갖고 화란은 일본과 교역하려 했고, 한국과도 교역하려고 했었는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정신의 여정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놀라울 수 있는 그 무엇의 저변과 성실성이 있는 것이다. 대게의 경우, 체코 출신이었는데, 프랑스에서 약간의 철학자처럼 지낸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추운 겨울 날의 호불호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늘 언제나 고대 중국의 가르침처럼 나의 주역(protagonist) 같은 산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저런 오토바이 츠케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