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영화 몽키킹(2014): 역사와 아프리오리, 하나님 신앙에 관하여, 츠케멘 알파육천을 갖고서.......
나는 플라스틱 간판의 색감도 좋아하는데, 알파육천으로는 그것의 원색이 좀더 플러스가 되어 나오는 것 같다. 조절이 가능한지. 아니면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지. 따져 묻고, 속으로 반성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런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풀 프레임으로 갈수록, 색깔이 진해진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가, 장치의 한계와 일치하여서, 내적이고 관계적인 불만이 화면 자체가 불확실하고 한쪽 구석이 불성실한 것으로 대신하였었는데, 풀 프레임으로 갈수록,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내면적인 번뇌(burning brain)가 없고, 민족간의 갈등이 없었을 때로 돌아가는 듯한, 그러니까 그 시절의 정상의 빛깔을, 과장이라는 것은 의미상으로다가 담아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우리가 붉은 색 체크(冊) 무늬 겨울 옷을 좋아하게 되듯이,
우리는 모두 단자와 같다.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개별 형이상학으로서,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까지만 나오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단어이다. 왜냐하면, 모나드. 한국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특히 선생으로부터, 몬났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크리스토퍼 말로위는 알아도, 삼봉 정도전은 모를 수 있다. 그것을 드라마로도 보아도, 맹자 찾고, 백성을 위한 정치 찾는 부분에서나, 사당에 선물을 올려놓을 뿐, 더 이상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말로위는 영국의 극작가로서, 그것의 선라이즈 선셋은 애국적 드라마보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따져 묻는 것이 아니면, 평생, 죽을 때까지 우리는 단자처럼, 머저리 캠프라던지, 크리스토퍼 말로위, 존 던 같은 사람을 더 가깝다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단자. 모나드. 사실 이와 같은 고민은 특별한 텍스트가 없는 것으로서, 단자, 모나드 하는 말만으로 우리는 한 몇 미터를 무거운 고민을 이고지고 전진하는 것이다. 아무리 역사적 인물들이 꼴값을 떨어도, 근사하고, 생명에 가까우며, 도시인의 종합적 판단에 이바지하는 외국의 서적들이 많은데, 애국적 향기처럼, 무쏘의 뿔처럼 그렇게 비사실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때에야만, 일제 식민지라든지, 북한의 침공이라든지, 할 때에나, 그것의 휴머니즘이 일종의 유니버셜리즘 같은 것으로서 겹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끝까지, 우리에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몬난 사람들을 위로하는 독일 철학자로 남을 수 있다. 그것에 불만이 촉발될 수도 있고, 촉발이 안될 수도 있다.
중국 영화 몽키킹은, 중국인의 자발적인 하나님 신앙이 늘 항상 부족하다는 것에 문제 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무식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무식한 홍위병들로부터, 비정상적인 추궁을 받은 선생 그룹들이, 그나마 보편적인 세계 문고의 독서에서는 일가견을 이루는 새로운 웨이브를 상해와 위난성, 선전 특별 자치구 어딘가에서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성경은 독서가 아주 만연한 훌륭한 문화 도시에서도 탑이고, 전쟁으로 쓰러지지 않은 건물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도, 책이 불쏘시개로 직화구이 되는 곳에서도 탑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하나님 신앙이 무조건 백점은 아닌 것이다. 자의식이 역사로 인해 추궁된 브루조아 계급이 있었을 것이다. 앞 뒤에서 무슨 사업이 그리도 많은지, 아버지가 뼈빠지게 다니고, 자식이 그 아버지의 노동 때문에 마음 편히 놀지 못하는 것으로다가 시절을 지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강제적으로다, 강제규, 집에 책들을 많이 비치하고, 집에 훌륭한 보편적인 음악과 음향들을 많이 가져다 놓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세상도 아니니까, 어쩌면 관념의 꼬드김에 계속해서 길을 가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부창부수라고 한다. 아버지가 창녀처럼 일을 하니, 자식이 공부를 글쓰기를 꼼꼼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교회를 짓고, 교회를 크고 근사하게 지으며, 천주교 교회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모범이 되게 짓고, 비싸고 좋은 교회는 반드시 서양에서 수입한 스테인드 글라스에다가 파이프 오르간을 놓는 것을 일도 아닌 것으로 하였다. 연주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 건반 틀린 것을 두고, 손바닥을 때리고자 하는 장로와 집사는 없는 것이니까, 다만 말씀이 화육이 되어 육체적인 감동까지 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이 거대한 샨시댐처럼, 차단되어 있다. 돈을 집단이 모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삼국지가 나오고, 서유기가 나왔을 것이다. 손오공은 삼국지의 인물 중에, 살아서도 모을 것이 없고, 죽어서도 문학적인 칭송이 없을 손권의 것과 이름과 발음의 궤적이 일치한다. 작가가 다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삼국지를 짓고, 서유기를 나관중이라는 사람이 썼을 확률이 높다. 수호전, 홍루몽까지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주 아득한 기억에, 손오공이 천도복숭아를 먹고 곤란을 겪었다는 것을, 책으로 읽었는지, 아니면 티비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책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분명 아직도 남아 있는 상해의 뒷골목 같은 아프리오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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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은 역사적인가? 아니면 문학적인가? 아니면 종교적인가? 영화를 너무나 잘만들어서, 이 정도의 공력이면, 거짐 나관중의 손오공의 지성소에 도달하였다 평가를 들을 만한 것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누구인가 끝까지 모르고 보면서, 참 연기를 잘한다 하였는데, 견자단이었다는 말을 듣고, 두 번 놀라고, 세 번 놀랐다. 드디어 대표작이 나왔구나 싶었다. 소림축구를 때린 것이 아니다. 소림축구는 자기가 많이 먹는지, 아픈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것은 쿵푸허슬도 마찬가지이다. 쿵푸허슬을 때리거나, 학대하거나, 얼차려를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름 방법이면 방법이고, 어쩔 수 없이 터널을 뚫는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이천십사 몽키킹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는, 아무리 나의 힘을 빌렸다지만, 양명학적 근거에 따라, 자기 힘으로 일어선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촉산을 또한 때리거나, 얼차려를 준 것도 아니고, 베이징 대학, 복단 대학, 중국 철학과 교수를 데리고 억지로 히말라야 산행을 시킨 것 같지도 않다. 영화제작자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잘해주었으며, 학생이 바보짓을 하면 바보짓을 하는 대로, 선행을 하면 선행을 하는 대로, 그대로 두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원숭이 申은, 이미 중국적 에버리지에서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국가간의 경쟁은 오직 더 남는 게 있는 사람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시골에 사람을 던져 놓으면, 십 년 넘게 지내게 하면, 대게의 중국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니며, 충분히 훌륭한 것이다. 내가 씨비도 타고, 데이스타도 타고, 전국을 차유람하며, 곳곳에다 아름다운 글을 심고, 특히 사람 없는 자연의 실루엣을 찍기 좋아하는 것은, 그와 같은 중국 청년에게는 몽키킹의 장면 같은 영화 중에 영화요, 영광 중에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들도 그래봤으면 하는 바람. 시골에서, 시골 사람들과 대화하고, 오늘처럼 자연이 변화무쌍한 날씨에는 사진도 최신 사진기로 찍어보는. 글을 쓰는 것은 옥황상제의 것이라 하더라도.......
이번 영화에서는, 그것의 새로운 중국 유학적 발견이 엿보인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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