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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람은 얼마든지 부르조아(부자)로 살 수 있다. 시카시, 아마존의 점진적인 소멸.......

by 마음대로다 2015. 1. 8.

사람은 얼마든지 부르조아(부자)로 살 수 있다. 시카시, 아마존의 점진적인 소멸.......

 

 

 

 

 

 

 

 

 

 

 

 

프랑스의 부조리 작가 아무게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 아무개가 부조리한 햇빛에 휩싸여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과정을 그려낸 적이 있다. 그것은 당장에 동경대학교 어문학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문부성은 그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라고 엉터리 통계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헤롤드 불룸의 영양소 파괴의 불안. 그것들을 모두 싸잡아서, 페키지, 어느 유명한 스키다요 스키장에 모이게 한 뒤에, 유언을 작성하게 하고, 그것 중에 가장 좋은 것만 선발해서, 생존을 연명하게끔 하는 세계 문학 사상 초유의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다. 그것의 바틀비 스크리브너는 그나마 비극의 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쇼생크 탈출처럼, 저마다 칸막이 안에서 훌륭한 유학자의 유언을 작성하고, 땅콩 회항 안주에다가 시원한 아사히 비르를 먹게끔 하면, 그 한 날 한 시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우리의 밤은 너희의 낫보다 아름다운 종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신에 극단적인 것은, 유적 판단 속으로, 갑자기 문장 파괴, 의식 파괴, 행동 파괴의 초절정 울트라맨으로 전세계의 에어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잡아 뜯는 것이, 맛보고 즐기는, 엑티비즘적인 리터러리 앙가주망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스. 그것의 진행과정은 몇 단계이다. 하나는 씨엔엔. 중국인 친구 씨씨티비. 다른 하나는 드디어 아이폰. 사람들이 조류 독감에 걸려, 이광조의 시를 읽고, 최수명의 수필을 사랑하였는데, 도리어 미국인 스티브 잡스가 그것을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패드가 나왔다. 정말이지 헨리 퍼쎌, 로물루스 형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아이에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문예 사조의 종말이다. 부조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나마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동시동작적이었다. 그리고 죽기까지 부조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존주의였고, 시몬느드 보봐르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까뮈는 얼굴이 안까맸고, 사르트르는 눈에 작은 장애가 있었으며,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사르트르의 부조리 주의. 그것은 까뮈의 담배인삼공사 특허였으나, 사르트르에 의해서 실은 언급된 바가 있다. 한국에서는 그저 이상한 여자나 남자이지만, 작은 장애가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던 그의 철학적 자유는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지만 상상을 초월했다. 프랑스에, 테카르트 이후로 그와 같은 철학자가 있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까뮈는 양명학에 빠졌지만, 자기는 안까마면서, 사르트르는 어머니가 만드시는 메주처럼, 그것의 끝을 <면과 생존>으로서 분명히 하는, 어쩌면 박상면의 가장 직접적인 데지그네이션처럼 과정을 연속으로 하고 있다. 사람은 책을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으로서 행하나, 사르트르의 문장은, 그의 훌륭한 두 책은 하나하나 저장하게끔 하고, 간장도 만들고, 팔아서 쌀을 사게끔 만드는 과정이 있다. 그것을 모르거나, 행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정당한 불만이어서, 국외로 추방당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부조리가 그것일 것이다. 얼굴마담 보다 얼굴이 한없이 아름다우나, 우리나라 탤런트 유선처럼 내가 사랑하는 비극 그 이상의 무지개를 만들어주지 않으니, 어떻게 나왔는지가 부조리이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다음이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학생은 경찰권으로부터 교수를 보호해준다. 학생이 없다보면, 숱한 아이에스가 끼어든다. 영화광들이 끼어든다. 누군가 끼어들어, 방조한다. 우리가 욕을 자주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이 유한하며, 성기 끝에 전뇌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빠지지 않아서 구급차를 부르는 프랑스 영화를 찍게 되는 노을을 보게 될까 염려되어서일 것이다. 그것이 염려되어서, 욕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기 끝의 전뇌현상이, 매우 복잡하며, 그럴 듯한 이데올로그를 갖고 있다 보면, 사람이 백제의 시간에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명목상의 왕을 만들어, 사자에게 왕관을, 지필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도 할 일이 없는 아이에스는 준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능의 싸르트르의 끝은, 결코 개인이나 집단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늑대인간이 로물루스가 쓴 것 중에 훌륭한 것을 발견해서, 모두를 놓아주는 기적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치자. 그것이 그렇게까지 그른 것이 아닌 것은, 우리가 강당에서 음악 수업을 받거나, 시청각 수업을 받고 오면, 늘 언제나 우리들의 적당주의가 발가벗겨진 것 같은 누드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tv가 평범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마저도 방송국에서는 대통령을 시켜준다. 사람들은 그것의 인과나 벽돌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아무런 데에서, 차를 놓고, 잠을 자다가 집에 오는 문명 천사의 절대적 행보를 한 경우에, 다들 그저 그런 만물유전으로 납득이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높이 올려진 적이 있었다. 그것의 극치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이문열 원작의 한국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애국심도 있고, 문학 정신도 있고, 학생으로서의 자의식, 선생으로서의 혁명 의식, 최대치, 오달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늘 한 템포 떨어졌던 한국 영화가 욱일승천기를 온 몸에 두른 것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선셋로드 비치에서, 학생들은 급식을 먹고, 카페테리아, 수업을 선택하며, 최진실, 두꺼운 책들을 대학생처럼 가슴에 껴안고, 집에까지 가져가지 않고 학교 케비넷에 넣어두면서, 컨버세이션을 행한다. 우리는 지하철 2호선에 있는 것 같았고, 일호선의 에일리나 아이비 등을 뚜레주르나 빠리 바께뜨처럼 부러워했었다. 이대역에서인가? 내려서, 서강대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어떤 여학생의 말처럼 똥냄새가 났다. 그것은 여자들의 자유이다. 어쩌면 불쌍하고 참혹하다. 나는 그렇다고 외국 여학생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영어를 못해서라기 보다는, 벌써 신앙의 간증 같은 부조리에 대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보편적인 아이에스이다. 나는 한 학기 다니면서, 그곳으로 십여차례 더 다녔다. 여자는 얼마나 얼굴이 개같은 서강대 총장년처럼 되었겠는가? 물론, 모찌롱, 서강대 총장은 그것에 두껍고 무거우며 비싼 대학교 학과 교재처럼 관련이 없다. 화를 내면, 에너지를 상실하고, 사랑을 하면 원자력 발전소가 생긴다. 부조리의 비닐 래핑은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있고, 그것은 계속해서 전진하는 자를 옷벗고 괴롭히는 것으로 있다. 우리나라의 tv 생활 화면들이 발전한 것도, 다 나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유일하게 첨단이었던 적이 있었다. 다른 모든 작품들은 다들 순수 문학이던지, 복고 중에 복고를 달려가는, 이비에스 한시 탐방의 이중 복고 같았다. 우리들이 시청각 교육을 행하면, 북한은 무너지고, 일본의 공교육은 정상화 되며, 북경의 칭화대는 하루하루 철학력이 증진한다. 왜냐하면, 부끄러우면, 있는 그대로의 옷을 입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다만 한국의 청년들이, 프랑스의 총격 사건과 같은 아이에스의 감각에 노출되는데, 그와 같은 원자력 발전소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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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시, 브라질의 철학적 아마존은 피를 흘리지 않는데도, 윤상 근심가 feat 신예원 불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