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의 저술 중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세 가지. 난중일기, 구운몽, 환단고기이다.
오늘 가족들과 설음식을 먹으면서, 잠깐 조선 문학 강의를 했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이유가 하나인데, 그것은 조선의 정신이 바르고 높지 못해서이다. 때문에, 난중일기와 구운몽이 전쟁의 기록이고 기억이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즈뷔뉴 프라이스너의 비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한 아프리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공식은 단순하다고 하였다. 사람이 편히 살면, 공부를 안하고, 불편하게 살면, 공부를 등한히 한다. 그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지옥의 그림자 저 멀리에 있는 신입 장군이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만주의 벌판으로 끌려가는 듯 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편히 살 때, 달나라까지 갈 정도로 공부를 왕성하게 하고, 불편하게 살 때, 공부를 짬짬히 공부하면서 깨가 쏟아지듯이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이황과 이이의 글이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훌륭하기는 하나, 너무 많은 관습과, 너무 많은 대감과, 너무 많은 눈치가 버무려져 있다고 하였다. 이황이면 당대의 최고 학자요, 이이면 그 사람이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일까 조선의 인물 중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기대승에 의해서, 이황은 영토가 정확하게 그어진다. 그의 관념론은 일종의 하석상대, 그러니까 신부가 준비해야하는 너무 많은 물품들인 것이다. 대감의 입장에서는, 아들 둔 자의 제도에서는, 그것은 관념인 것이다. 관념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신부의 준비 물품도 자기의 것인 것이다. 이황은 한쪽에서 보면 정리정돈이 좋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한쪽에서만 보고 살 수 있겠는가? 기대승이 그를 잘 비판하였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비판의 기는 잘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단촐하게 말해서, 리마저도 기라고 했다. 그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 것이, 후학들의 난맥상이 된 것일 것이다. 이이는 그와 같은 당대의 성현들의 논쟁의 기운을 잘 전수받은 사람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툭하면 사화니 당쟁이니, 기생 성리학의 상부구조에서 잘난 척하고 바쁜 척하고자 할 때, 척 부인, 그렇지 않은 아카데미를 끌고 다니면서 입궐도 하고, 퇴궐도 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정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옷자락을 끌고 다니기만 해도, 주변 서생들의 존숭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대부분, 유사성경적으로 질식하고 만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맹자와 순자를 닮았다 할 것이고,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정정치의 탱화를 구현하였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형태의 관념론이 아닐 수 없다. 관념론이 나쁜 것도 아니요, 문장에 진한 향기가 흠이 결코 될 수 없지만, 황희처럼 기대승과 같은 논쟁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에, 그와 같은 담론적 맥적 우주론은 소용이 다하고 마는 것이다. 이념은 고전이요, 출구는 자기이어야 하는데, 이념은 고전이요, 출구도 고전인 사람을 누가 학습할 수 있겠는가? 그것 자체가 바로 현상일 수 있다면, 우리는 눈물로써 그 죽은 사람을 세고 살아 있는 사람을 전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는 정말이지 즈뷔뉴 프라이스너처럼 바다 위를 판옥선으로 너울거린다. 추혼십이검이기도 하고, 월광검법이기도 하다. 모든 저서와 작품은, 어린아이 때의 입각체 아래에서 시작하고 끝이 난다. 그것의 암호이자, 코드가, 프로이트의 어른들의 성욕은 어린아이 때의 재연이다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보니까,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싫어하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독특한 신화가 개개인마다 강요되고 만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도 없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 다만 어린아이가 소천자의 반도체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지를, 신념을, 교육적 믿음을 갖게끔 한다. 난중일기는 참으로 고통의 기록이요, 위대한 주자학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주자학의 고통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것도 모르면서, 난중일기의 휘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ost는 그것을 대치한다. 검고 푸른 바다 위에서의 심판은, 수많은 법대생의 회오리 안에서, 그것의 부재를 상정한다. 밥먹고, 잘 자라서 법대생이 되지만, 성리학도 모르고, 주자학에도 이르지 못하는. 붉은 용상을 입은 이를 두고 무한하게 아첨하는 민중으로 전락하는. 단자론. 혹은 일차원적 인간. 헐버트 마르쿠제. 이순신의 배는 그것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궁녀들의 개몰이꾼에게 있지 않음을. 한양의 여인들은 모두, 잠깐 했던 공부는 걸어놓고, 대감들에게 아부하는, 혜경궁홍씨들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 히도이한 처사인가? 존재와 사유의 일치인가? 난중일기를 그렇게 읽는 사람을 나는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난중일기를 읽을 때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세 번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 구운몽을 읽을 때, 그리고 환단고기를 읽을 때. 그러나 이번에 구운몽을 읽을 때는 눈물을 벌써 세번 흘렸다. 세 여자 모두, 읽는 이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기쁨이 있었대도, 쾌락이 있었대도, 그것이 감싸지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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