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님과 야상곡의, 옷기는, 국문학적 권력의 상관관계
점장이들과 강원도의 힘은 나름 겹치는 데가 있다. 우리가, 단풍이 우리 작은 다섯손가락처럼. 클래식 우월주의를 사실 우리들의 문학과 영화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삼국시대를 보라. 서로들, 싸우지 않는가? 플라톤이 나타나면, 플라톤과 싸우고, 유인원이 나타나면, 화이트헤드의 영원적 객체처럼 아이덴터티...... 싸운다. 어쩌면 설인귀는 기가 막힌 설정이 아닌가 한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나오지만, 그것의 당엔탈리즘. 당나라 사람들은 늘 서방과도 교역하고, 양귀비를 흡입하며, 당태종 당현종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꿀 심은 데 꿀 나고, 소녀의 마음을 심은 데 소녀의 마음이 나온다는 원리원칙에 따라, 설인귀가 온 몸을 치장하고, 싸울 때도 괴성을 지르면서 싸웠는지 모른다. 그것은 투사. 남의 나라는 살아보지 않았으나, 내가 사는 나라에서 누적되는 저 깊은 쌍놈들...... 그렇게 보면 설인귀는 유인원의 대차대조표이며, 작가적 주자의 자기는 싸운다는 마음의 징표이기도 하다. 이런 문예비평문들. 아무도, 어느 누구도 원선하지 않는. 당나라 장수의 설인귀와의 조인트. 그의 말은, 바울의 로마서 같기도 하고, 입장과 포부는 플라톤의 유려한 선의 종지부 같기도 하다. 시황제의 강한 산성 같기도 하고, 성경의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씨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우리는 보통 말한다. 시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그것의 사회적 조건, 문장과 작품은 독립적인 성격을 확보하게 된다고. 우리는 그것들의 작품주의를 미국의 시평론가들로부터 배웠지 않은가? 웰렉? 아닌가? 나름 티에스 엘리어트. 하여튼 그런 것들은, 지배적인 맑시즘적 문예비평에 대한 여자들의 비싼 핸드백에 대한 애호처럼 앙가주망 했었다. 사람이 서 있지 못하고, 범선의 돗처럼 대개 바람에 눕는다. 그렇다고 바람이 없을 때는 서 있는가? 어느 여인네가 마음은 젊은데, 가슴만 늙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되겠는가?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반야바라밀다시....... 설인귀는 작품이 독립하지 않는다. 눈만 내리는, 경이롭고, 거의 미칠 듯한 작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보면, 설인귀와 유인원은 성 안에 있다가, 밖에 나갔다가, 안에 있다고 하는데, 말하는 사람도 안과 밖 알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남자가 이 정도의 방랑광시곡을, 아닌 듯 긴 듯, 쓰느냐, 행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에게는 영혼이 자유가 근본적으로 없느냐는, 쓸데 없이 돌아보는 각성이 끼어 있는 셈이다. 두 영화는, 점장이들과 강원도의 힘, 그것을 노치기가 싫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오니언피니언..... 높은 정신, 높은 정신 하지 말며, 여자도 싸우고, 소녀도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싸운다는......
레파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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