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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건국대. 아름다운 근대 건축을 보면서

by 마음대로다 2015. 11. 10.


건국대. 아름다운 근대 건축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대학교 다닐 때, 시위하느라고 건국대를 간 적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수원대를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아주대, 한양대 저쪽 캠퍼스를 간 적이 있는데, 건국대는 어떻게하다 간 것일까? 만일 내가 시위만 하기 좋아했다면, 제법 많은 대학교를 탐방하였을 것이다. 건국대를 간 계기는 조금도, 정말이지 소의 한 터럭도 생각나지 않으나, 넓고 좋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감각은 상대적이다. 나는 철제 콘크리트가 클래식 선율 같았고, 미래적인 캐릭터로서는 예술 문화의 선봉장과 같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클래식은 늘 언제나, 수능 시험 성적과 관련을 맺으며, 일류대와 이류대를 어쩔 수 없이 예수의 상흔처럼 가슴에 새기는 듯 하다. 건국대는 내가 집에서 혼자 공부해서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물론 일단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갑자기 부잣집 아들이 아파서, 학교를 못가고, 공부를 다른 학생들처럼 열심으로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부분만이라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래서도 입학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연고대, 서강대는 그렇지 않다. 얼마나 공부는 어렵고, 내면으로 복잡한 산맥과 같은지. 그들은 잘 만나주지 않는 여배우들 같아서, 한국 영화 여배우들, 보진 않았지만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위를 하다가, 시위를 하기 위해, 차분하게 굴러들어간 건국대는 이름의 영어적인 konkuk? 콩국? 하는 느낌과는 다르게, 아스라하고, 벌판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대게의 대학들이 그 시절에는 아스라했고, 자동차적인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넓은 스페이스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학 캠퍼스였다. 성균관대 수원 캠퍼스만 하더라도, 약간 쓸데 없이 넓은 느낌? 그런 재밌는 것을 선사했었다. 두번째 세번째 시위 모임으로 갔을 때는, 벌써 재미가 없고, 식상하고, 피곤하고, 그랬었다. 그래도 누군가 하버마스 발제를 했을 때는, 우리는 약간 열변을 토하면서, 토함산, 세미나 후의 논쟁적인 담론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 배석자는 영진이와 웅이?였을 것이다. 내 친구들이다. 지금은 세미나의 세계에서 탈락하였지만. 다만 침목이라는 것은, 침묵이나 침목과 같은 것이어서, 친목, 그들 세계에서는 세포가 살아있는 것이나, 세미나의 세계에서는 이미 탈락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 대학 입학 시험이라는 것이, 본질이기도 하고, 엄청난 재시험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호수를 가로질러 들어가는 느낌이 넓었고, 그 아무 것도 아닌 개방형 기둥틀이 그때도 사느냐 죽느냐 청년들에게 강요되었던 형이상학적 고독들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도 자판기 커피를 좋아했었다. 그때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다는데, 정말 그렇다. 거기서 구분이 없다는 것은, 혼사장애라든지, 혼을 결한다는 의미에서의 결혼이 없다는 뜻이지, 연애가 없다는 것이나, 뜨거운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애마저도 시간을 필요로 하고, 뜨거운 사랑을 하다보면 책의 복잡한 활자와 의미를 좇아갈 수 없다. 다만,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입출입만을 따지기 때문에, 훌륭한 선승이 아니고서는 거기서 마음의 진보를 이루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우리는 세미나하고, 시위를 할 때, 사실 고기의 등급을 메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학생회장이 잘 생기고, 그에게 모델 같은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을 겨울 바람에 콧물을 흘리는 것처럼 신기하게 또한 좋아라 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각진 것이고, 굴곡진다는 원리에 따라, 금세 그것도 굴곡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미나의 백제 세상에서 나가지 않고, 또한 침목으로 침묵되지 않는 참다운 친목으로, 친니친니, 나아갈 수 있으며, 존재론적인 심한 부침 속에서, 마침내 모든 것이 폐허가 되는 군부대 훈련장에서 대학교 캠퍼스를 사수할 수 있는 것일까?


포토샾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매우 이지적으로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약간, 패션과 아무튼 그런 룰을 별로 따르지 않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분명히 있고, 남자도 신경으로써 그것을 존숭하는 바이지만, 별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이다. ^^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여자들의 전화가 근본적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서울과 경기도의 차이처럼. 서울은 부자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서울로 유학온 지방 출신 학생에게 있는 것일까? 그것의 신비로운 광풍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서울에서도 사투리 쓰고. 서울을 잘 모른다고 하는데, 한 몇 년 지나고 나면, 서울 사람들보다 더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는. 만일 지방 유학생이 아니면, 서울 사람들 중에서도 경복궁 한번 가보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나도 서울 유학을 와서, 경복궁 한번 가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줄 몰랐었다. 그러니까 세가지의 자연이 있는 것이다. 지방 귀족이 서울에서 명소 탐방을 하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서울 사람이 공부하느라고 집하고 도서관만 다니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끔 코엑스에 놀러가서 길을 잃는 나 서울 사람 맞아? 하는 스페이스 셔틀 인턴쉽, 그것의 부재, 의미의 부재, 어떤 씨네 21의 영화평과 같은 엘랑비탈, 프랑스어, 그놈의 프랑스어, 그리고 지방 유학생이 공부하느라고 남산 타워에 한번 올라본 적 없이 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여학생의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감추고 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바람이 불고 있다. 영화의 한 효과처럼. 비오는 것도 싫고, 눈 오는 것도 싫다. 살수차가 필요하고, 눈 만들어내는 기계가 필요하다. 흑백일 때는 나름 쉬웠을 수 있다. 바람만 불기로 하자. 건국대에서는.


콩국.


여자가 모든 것의 절반을 잃는 룰렛 도박으로다가, 재산의 절반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인문학과 비슷하다. 어째서 우리가 불문학을 공부하고, 다만 멸치만 먹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광개토대왕이나, 우리는 프랑스 유학을 가고, 파리 애마라도 필사적으로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들 먹거리와 기본적인 성학집요, 그러니까 성리학적 리발 기발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의 논문이 하나같이 불만으로 토로하는 것이 그것이다. 리발이 무엇이고, 기발이 무엇이고, 공부하고, 술마시고, 춤을 춰봐도, 뚜렷하게 이것이다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라이딩을 떠나는데,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포토샾을 할 때도 현기증이 나는 것이, 그것만 하는 기발이 될까 하는 것이다. 여자는 마침내 인생의 부침을 거듭하다가, 아름다운 용모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의를 입지 못하고,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학교앞 분식점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아르포스? 아르토스? 그러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