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프라이드앤프레쥬디스와 엠마의 상관관계. 제목들의 절창들
날씨가 슬픔을 강요한다. 슬픔은 꼭지가 있는가? 그것은 무전. 무전기를 뒤에 매고 여행을 하면, 전생의 여신 안테나...... 기아 자동차 나오고, 예쁜 여배우가 나오는 한적한 국도의 나라. 만화책과 잘 가꾸어진 펜션 카페. 설치미술처럼 석유난로가 있고, 주전자의 얼굴이 내용물로 뜨겁다. 슬픔은 비행하는가? 카나라즈. 쇼송의 사랑과 바다의 시라는 소품은 처음 듣는데, 아름답게 느껴진다. 미얀마는 알리야를 통과할 때 발생한다. 동해에서 오징어가 유명한 것이 일리가 있다. 우리는 포크 댄스를 추면서 죽을 수 있다. 그것은 밀턴의 어떤 시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돼지 댄스를 춘다고, 그 순간순간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함도 사야하고, 함잡이는 얼굴에 오징어로 만든 탈도 써야 한다.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아이비리그, 주자학적 괴룡의 위태로운 옛날 홍콩 케이택 공항 착지일 수 있다. 기념품을 사고, 사진 찍고, 응원하고. 소리치고. 개인은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의지와 하나가 되며, 회사와, 스타 플레이어와 하나가 된다. 결혼은 진실한 것으로서, 미국 청년이 강요에 못이겨 한국까지 간 뒤에 전주의 이성계 사당까지 다녀와야 하는 물리적 전변을 겪는 것과 비중이 같다. 공부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공부는 유치환의 깃발과 같은 스포츠로서, 왜,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동서양이 캠퍼스에서 포크 댄스를 춘다는 것은, 양 진영의 학문적 저변과 대학촌과 같은 영화 가능성이 충분해졌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시카시, 한국과 미국, 일본과 중국은 그와 같은 평범하고 차분하며, 카나라즈, 외국어 단어장을 늘 옆에 끼고 공부하는 친구의 얼굴 한번 의무방어식으로라도 보여주지 못한 것일까? 동감 같은 것. 기분에는 굉장히 많이 본 것 같은데, 동감 같은 것. 청포도 사탕은 제법 강한 두부 같은 것에 사탕처럼 깨지게 되어 있다. 이빨로 깨뜨리나, 시각적인 색근의 방식으로서는 저기 있는 두부가 깨뜨린 것 같은. 까뜨린느. 애타는 무전. 클래식도, 영화, 무협여대생도, 권력의지가 별로 없었던 동감에 뒤쳐지고 만다. 이우진은 그래서 의지도 없는데, 대학 근처에, 신촌역, 나이트 클럽이나 거대 올드보이 호프집, 이웃나라에까지 맛이 기가 막히다고 소문이 난, 옹기종기 군소단위로 떨어져 있어서 그렇지 모아 놓고 보면 꽤 세력을 과시하는 찻집과 아시가 시려울 땐 난방을 즉각적으로 하기 보다는 무릎 담요을 가져다주는, 남자들은 처음으로 그와 같은 부가물에 부러운 시선을 갖게 되는, 카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그런데도, 나는 올드보이는 오대수만 기억하고, 동감은 김하늘만 기억한다. 둘 모두 작가의, 감독의, 배우들의 의지였을까? 봄날은 간다는 그나마 불쌍한 누군가의 대역 배우를 상기하게끔 한다. 이영애가 너무 감질맛 나게 굴기 때문이다. 대국굴기. 제목도 이상한. 엔에이치케이. 그것도 그렇다면, 그것의 보이지 않는 보관 창고를 염려했던 것의 소산이라고 누군가 말하겠는가?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보면, 박중훈은 안성기와. 그냥. 연기한다. 딱 무한도전 같다. 이런 우연적인 말맞음이 무슨 싹쓸이 같은 것이 되겠는가? 비에 젖은 은행잎을 남이섬에서 여학생 둘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목걸이는, 거는 자에 의해서 유일한 제목이 될 수 있다. 이 말 만큼은 우연으로 건져올린 것 같다. 목걸이는, 거는 자에 의해서 생의 유일한 제목이 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거의 모든 영문학이 그렇지만, 부분균질의 소산이다. 어쩔 수 없을 때 우리는 존재가 부분균질 되는 것을 용인하지, 처음부터 그것을 의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명한 맨섬 오토바이 경기처럼, 맨섬을 무시무시하게 질주하는 혼다 오토바이 같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여자들을 영국에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샬롯 브론테가 평가하길,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사랑은 열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 그것은 참 좋은 이불이다. 마라톤에서 마지막에, 사람들이 기진하고, 갑자기 온도가 떨어져 한기가 들까봐 담요를 가져다 주는데, 여자들끼리의 적당한 시니피에가 얼마나 존재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 엠마에는 수많은 전치사와, 비좁은 행위들과, 가족 안정주의가 등장한다. 센스와 프라이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공부를 참 많이 했고, 심지어는 도시의 가능한 여러 관계에 기획적이기까지 한 것을 볼 수 있다. 로빈슨 스크루지의 작가. 그는 자신의 작가적 안목으로 자기 나라 사람들과 프랑스 사람들을 비교할 수가 있었다. 오스틴은 한 남자의 가능성과 그가 런던으로 가는 풍경을, 여자로서, 기차 건널목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남자들의 머리도 말끔하게 깎을 수 있는 이발사로서,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사람에게 이런 옷이 요즘 유행이라면서 권해주는 테일러리즘 같이도, 막힘 없이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이동은 문명 이후에, 교육 이후에, 관념들의 사전 이후에, 다만 가족과 가족간의 연락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반드시 그래야 하며, 제인 오스틴은 음에서는 양을 지지하고, 양지, 양에서는 음을 돌본다, 음양하는 것을 참 잘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다. 샬롯 브론테가 하루를 멀다하고 그녀의 집을 오갔다면 모를까? 책들이 책들이, 보지 않는 것까지 물심양면으로 가져다 주는 워즈워드의 친구 키츠나 셀리의 친구 잘 모르지만 바이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도, 아니한다면 더더욱, 훌륭한 원여성이 점점 서울 표준말로 탈각되는, 무성적인 citadel은 감지가 되지 않는다. 만일,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절대의 매개가 상상된다면, 말의 느낌이 그렇다는 취지에서, 거철 혹은 융철, 우리가 대가라고 무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프리드리히 헤겔까지도 여성이 될 수 있었다. 서양은. 그것은, 성의 전변이나, 혼합, 부적절함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에이비비에이, 아바의 아름다운 두 여인처럼...... 구약 성경에 거짐 마지막 유대왕인지, 이스라엘인지, 히스기야는 점치는 사람과 화살 점을 쳤다고 한다. 소설은 전쟁 소설을 어쩔 수 없이 가질 수 밖에 없다. 남자들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대신 화살을 쏠 수 있다. 장녹수처럼. 그리고는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자위는 남자도 하고, 여자도 하지만, 하늘 아래 이 무슨 하나의 구조주의인가 싶을 정도로, 마치 남자들만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을 수 있는 것 같다...... 엠마는 막혀 있다. 센스와 프라이드처럼, 아시가 가볍고, 계단을 두세개씩 뛰어오르지 못한다. 상징계로 보면, 작품이고, 여성 작품이라는 에펠탑, 상상계로 보면 훌륭한 문장들이며, 대학교 기숙사처럼 발랄하고 요란하며 다정하고 그 근처에서 가장 예쁜 사람들로만 모여 있는, 실재계로 보면 시어미 나오미의 타박이 시작되고, 아기들을 상대로 자기도 점점 그리해지는 한 곳인 것이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의 전작들도 의리상으로 보면 허위의식일 수 있는 것이다. 맑스가 혁명주의 이론을 개창한 것이 순전히, 오스틴의 위선적인 페미니즘을 지적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로부터 든든한 돈의 가치로서 출판 산업의 한 기둥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해가 지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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