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적 器好學: 사람은 어느 때에 그나마 예쁜가를 두고
네 명의 뿌띠들이 사장이고, 에프포, 돈이 많은 예술가에다가, 중국 사람들인데 중국 현지에 으리으리한 별장을 갖고 있는 실업가, 옥스포드 여행을 다녀온 상해일보 기자 삼촌까지 있다 보면, 가운데 젊은 처녀는 삼대에 걸쳐 좋은 선만을 갖다붙여서도 보기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경찰에 항거하지 않고, 늘 매점매석을 하고, 조상 중에는 기생도 있는 실험주의에다가, 특히 민어 요리를 좋아해서 영양도 좋고 피부도 탱탱하다. 관지림을 알고 있고, 영어로 된 책을 아주 좋아한다. 형식이처럼 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북경에 영어 학원, 중국어 학원을 다녀오고 나니까, 나는 누구인가? 소문이 달리 나는 것이다. 다만 함께 있었고, 두 사람들이 친구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관계가 없으며, 여자는 한국 여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가.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돈을 모아서, 중국에서 다시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여자는 아직 중국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 점점 더 유행에 뒤쳐지는 옷을 입다보면, 입센이나 안데르센에 들어가게 되고, 중국어를 잘하게 되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노신이나 임어당이나 풍우란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니콜이나, 슈쥬의 맴버 중에 한 명처럼 된다. 그들에게 서울대 국문학과의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무리가 아닌가? 갑자기 배용준이 피아노를 치더니만 자기가 천재가 아닌가 떡살을 피웠던 장면과 매치가 된다. 최지우는 지우개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가난한 시간을 내놓을 만큼 최정상은 아닌 것이다. 그것의 정치적 행보 같은 유휴노 소타나. 처음에 용준이가 읽었던, 모나드 속의 적발심이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씨였었다. 나는 지적인가? 그리고 악마의 씨를 읽었는가? 그의 잡스러운 인터뷰보다는 작품 자체만으로는 영화스러웠다. 사람들이 일본 여행을 다니다가, 미야자키가 괜히 나온 게 아니더라 워킹 문예비평을 행하듯이, 인도 여행을 다니다 보면 살만 루씨디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임을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용준이가, 우주론적인 기차 위에서, 극단적인 신체 분리술, 눈을 하나 꺼내어 메텔과 철이가 건너 편에 타고 있는 우주의 바깥에다, 창 밖으로다가 의식의 스페이스를 따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최지우는 혀가 조금 짧은 편이다. 그것은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였을까? 대개의 여성들의 애교는 문학성이나 어학 능력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문학성이 아예 없으면, 애교가 있다. 문학성이 조금 있어도, 재치와 짓궂음이 섞이더라도 애교가 있다. 문학성이 어느덧 대학원 졸업수준으로 넘치면, 애교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공부하느라고 지쳐서 안에 남은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애교는 애교심과 같다. 학교에도 별다른 사랑이 없다. 최지우는 거기서 이렇게 보면 지우개 빌려지고, 밀려진 것 같은, 느낌은 있다. 에머네이션이 하나도 없는, 그런 문학 교수가 얼마나 마음의 질적인 창에서 거미줄이 쳐지겠는가? 익살은 본질과 같은 것이다. 익살맞다 말하는 것은, 이대다니는 정상급의 여교수마저도 본질적인 것은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실제로는 모르지만, 티비에서만 보면, 그것은 우리가 아파트에 살 때 자기 사는 층수가 사회적 계급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공공 공중파의 사회저변적 의식을 반영한 것 같은 느낌은 있다. 어떤 이유에서 한 이삼층 위로 이사가게 되었다고 치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는 아파트에 살 때 가장 좋은 것이 비 내리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제법 내려도, 조심히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맹모삼천지교 같은 사람들이다.
아파트 동이 네 개가 있다고 해보자. 아니나 다를까, 대전에 있는 정부 청사가 그렇다고 하더라. 우리는 재빨리 지나쳐야 하고, 행여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조차 받아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친구가 자기의 성질을 돋굴 경우에, 우리는 그 순간 개목걸이가 목에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이스, 누가 건물의 소유주인가? 철학적인 사람은 아니더라도, 수행원 네 명과 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안내했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검은 화장지 같은 양복 입고 불친절하게 했을 경우에, 반드시 플라톤 철학이 있어야만 화를 내겠는가? 태초에, 로고스. 키가 크고 작은 사람들의 모임과 경제가 있어서, 아주 리인적인 철학도, 학교도, 그런 것쯤은 애니웨이 있었던 것이다. 화를 버럭 낸다고 그가 개가 되는가? 네 개의 네모 사이로, 한 사람이 개 견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갑자기 양반과 천민이 신분 변천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의 괜찮은 대상으로 여하한의 이유에서건 놓고 싶어하지가 않는다. 상상은 불쌍함과 같다. 태초에 경제 때문에 꼼짝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여자들의 의식은 남자들의 행동주의 때문에 고고학적인 것이나, 태초적인 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아무리 수행원처럼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멋스러울지라도, 그 어떤 머리카락과 같은 물리적인 스페이스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 일쑤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움직일 수 없다는 차원에서....... 지금의 문명은 어마어마한 금발들의 머리 뭉치들로 이뤄진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촉촉하면, 왠지 음악도 좋게 들리고, 책도 잘 읽힌다 하지만, 그것이 납작하고 머리에도 달라 붙으면, 미용실에나 오래 있으려고 하고, 미용실 사람들과의 권력 투쟁에 있으려고 하고, 잡지들 속의 인물들을 잡년들이라고 욕하고 싶어하게 되고, 뿌띠들에 대한 비판 세력에도 몸을 담가보고자 하는데, 그것의 춘추전국 갑을병정과도 같은 상태, 비판의 사람들을 선배나 후배로 갖고 있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무지함이었다. 상대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이 될 것이다.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동아리 선배로서 기초가 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북이나 치려고 하는, 끝까지 북이나 치려고 하는. 누구 한 명 내게 묻는 이가 없었다. 생명은 무지와 함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단.무.지.라고 부른다. 나는 이외수는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클래식에서 쫓겨난 정치인들이나, 춘추전국 같은 이들은 이외수 같은 것들과 사진찍기를 좋아한다.
이외수는 그나마, 토속적인 야한 조각상 공원일 수 있다.
드라마는 고통스러운 피사체이다. 보인다는 뜻에서. 소음이라고 하기에는, 권총이나 자동화기에 소음기가 있어서. 그리고 철학적인 이력이 없으면, 문장 하나 그럴 듯 하게 만들 지를 못하니까. 사채시장처럼, 피사체 같은 단어의 어드레스가 좋은 것이다. 사극들은 지하실 상상들의, 저녁에 바깥에 나가 세력 싸움하는 마지막 장면들 같고, 유신이니, 춘추니, 옛날에는 칠삭동이니,
에이브이 배우들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 기쁘게 하는 기술을 어디서 익힌 것이냐 묻고 답한다면, 아시면서 염화미소할 것이나, 그와 같은 이유에서 사극을 찍은 배우들이 약간 옛날 식의 정치판에 뛰어들면, 나라는 망하여서,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고기 만난 물처럼 아주 적성이 지대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현실과 구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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