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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개인적인 관련성과 작품적인 객관성: 세가지 색깔 블루(1993)

by 마음대로다 2013. 1. 1.

개인적인 관련성과 작품적인 객관성: 세가지 색깔 블루(1993)

 

 

 

 

 

 

 

 

안부는 영원한 부정인가? 이것은 우리가 바깥에서 춥다가,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도 매우 가까운 지인들에게, 닌자, 갖게 되는 일종의 낯뜨거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외람된 말도 해야 하고, 외람된 말을 한다 했다가 그만 두는 일이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외람된 말이란 어느 정도 행동주의적 성격이 있음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인정, 사회 계약,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세가지 색깔 블루는 상당 수준 낯뜨거움에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고 의미 없이, 순전히 나열적이며 범주적이고, 글자 하나에 백원이 달린 필사적인 글쓰기에서처럼, 영화가 세가지 색깔을 기획하고 나와서 그런 것도 있다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전어를 불에 덜 구운 일이 될 것이다. 키에슬롭스키 감독은 유럽 영화, 그것도 프랑스 영화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뤽벡송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현해탄이나 대서양을 오가면서 영화를 찍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륙과 하나의 거대한 섬과 같은 북미를 구분할 수가 없다. 프랑스는 금방 유명해지면, 헐리우드 영화도 다량으로 찍으며, 그것은 중국 감독이나 배우가 친해지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것의 반대는 두가지. 하나는 약간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연애 영화는 금세 살이 붙고, 이동이 부자연스러운, 등장인물들은 스마트함을 잃어버린다. 공포 영화가 어느 정도 미국 영화와 경쟁을 하는데, 공포 영화로 세계 영화 시장에서 승리한다는 것처럼 독립적인 문명 국가 프랑스에 독이 되는 일이 없다. 제목도 그런 것이 있다. 비독이라고. 훌륭한 공포 영화 자체가 없다지만, 영화는 인과를 갖고 나름 홈즈와 왓쓴의 사무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 표현적인 에스에프가 섬뜩하고, 한정 공간에서의 과밀한 광택과 디자인과 머리 모양의 곱슬이 동원될 뿐이다. 우리가 미국 영화를 찬양하는 듯 하지 않은 듯 해왔던 것은, 그것의 훌륭한 대중 매체 덕분이었다. 에디슨이 전구를 모든 어둠 속에 가져온 이력이 있는 것처럼, 마치 그의 제자인 것 같은 자기 정화 능력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도 유명 장편 소설들이 쇠사슬들을 많이 갖고 있는데, 영화에서까지 대중 매체로부터 벗어나 있으니,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보고 나오면 마음은 전구가 깨지고, 이것이 다른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로의 방향 두 번째의 것이 그래서, 세가지 색깔을 기획한 작가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그러나 매우 좁고, 사람이 칼잠을 자는 듯이, 향유자에게는 신기의 연속이고, 제작자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에서의 인디펜던스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자들의 글을 놀라워하는 것도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관념들과 개념들로만 글을 쓴다는 것이며, 그것이 사과를 먹으면 향기와 맛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귀한 경험, 작품, 다른 하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선배나 동시대의 철학자를 갖고 그것도 사과를 먹을 듯한 감각으로 비판과 정리를 행할 때이다. 세가지 색깔, 그것도 블루는 음악이라는 초절정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깥 바람. 추위는 늑대처럼 사람을 좇고, 거리의 사회성을 호불호 손을 불어가면서 잡기도 하고, 외면도 하면서, 실내에 들어오면, 그것은 믿음과 기대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음악은 초심자나 프랑스 영화 애호가에게는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의 증명서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 해놓고 천국이 무엇인지는 기독교나 비기독교 정신사 그 어디에서도 속 시원히 그림 그려주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진지한 작곡자가 한 명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바깥 바람. 내가 맞더라도 문을 열고 만나보고 싶고, 그가 맞고 들어오면 따뜻하게 그를 환대할 것이다. 술은 다른 친구와 박스로 먹어도 맛있지가 않고, 그와 세 병만 먹어도 작은 자취방의 인테리어를 싹 다 바꾸는 듯 하다. 마치 주례를 보는 것처럼,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실력으로 여자 친구도 사귀고,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의 기억은 음악의 주제와 같고, 우리는 때로는 이념에 취해, 자기의 주제를 망각할 때를 삶의 피크로 여기곤 한다. 물론 후자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예술론을 만나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급부로다가, 개똥철학이라느니, 예술가는 배고프게 산다느니, 밥도 잘 먹고, 직장도 좋은 곳에 다니면서도, 자기 한쪽의 철학자와 예술가를 북한군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잡아 가두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블루는 음악 영화로서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너그럽고 싶은 마음이다. 감독의 전작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너무나 완성도가 높아서일 것이다. 것도, 소비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 전문적인 사람을 만나지 않고, 맹목적이고, 사랑으로만 가득찬 예술학도들만 영화가 만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늘 아래 큰 나무가 있고, 돌쇠가 겨울을 준비하면서 장작을 패는 장면을 영화에서 쓰고 싶은 때도 있지 않겠는가? 타임 투 리브. 타임 투 킬. 블루는 장치는 세상 모든 요소들을 모두 갖다 쓰는 것 같다. 줄리엣 비노쉬. 젊었을 때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낭비를 못하는 착한 마음씨 상태에 정지해 있는 듯한 착각의 중점과 결혼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돈이 있고, 그것을 맹렬하게 선용하는 모습이 순자학의 절정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돈이 없을 때가 많고, 영화라는 독수리에게 우리의 심장을 맡기는 것을 허용하곤 한다. 달리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운동을 따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 말은 맞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 일찍 그것의 낭패를 보여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끌고 가고 있다. 우리는 작품이 법정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방정식의 면에서, 프랑스의 장 안에서, 의지가 녹슬고, 방 어딘가에서 뾰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퍼니라는 것은 결코 프랑스 영화를 사랑하고 줄리엣 비노쉬를 사랑하는 인류 모두에게 마땅한 게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작품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개인은 작품과 관련을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