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프라는 에이도스, 야쿠자라는 에이도스
신 휘
우리는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폭력 선생, 폭력 동기가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우리는 쾌락 원칙이고, 어디서부터 현실 원칙일까? 무슨 말이냐면, 학교가 너무 좋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의 쾌락 원칙을. 내가 학교 쾌락 원칙의 요소 백 중에 아흔 아홉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자가 반이기 때문에, 하나 없는 것을 치명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세상에 깔린 게 아스팔트 같은 여자요, 벽돌 같은 여자이자, 현대식 건물의 유리 같은 여자, 그리고 애프터 스쿨의 유이 같은 여자인데, 내게 여자가 없었다는 신세한탄만 한다는 것은 기아 자동차 K9 같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말이 디자인을 가리키는 것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보다 복잡하고, 결론이 없고, 머리만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 말이 여자를 가리키면, 그나마 여래장이라도 얻을 수 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같은 것, 건축 디자인 같은 것을 많이 보면, 뚜렷한 인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박심이나 증가하게 된다. 그것은 하트 에이스 같은 것, 스페이드 팔과 같은 것. 둘이 합쳐 블랙잭을 한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기본적인 포카에서는 뭥미인 조합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산만하고, 집중하지 않고, 카드의 표피질을 만질 뿐이다. 어렸을 때의 의지, 사랑할 때의 염정아가 생기지 않는다. 혜숙이. 그러면 우리는 누구?...... 하트 에이스, 스페이드 팔의 조합. 그러다 다이아몬드 에이스가 들어올 때, 우리는 내 개인이 깊은 기쁨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의 영예를 얻겠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트 에이스. 그리고 스페이드 팔. 나머지 둘. 여섯. 둘로 원페어를 하는. 액면이 상대방이 벌써 원페어가 있는. 다잉을 하는 나보다 현명한 표피질의 손가락 지문은, 얼음이 녹고 있는 오렌지 쥬스 잔을 만지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도박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수학여행 같은 데를 가서, 고스톱을 친다고 한다면, 너무 염의 왕, 염라대왕 같은 짓일 것이다. 도박을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야칭, 숙박비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아닐지라도 도모다치 친구 찾기 그러니까 친구의 구체적 관계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옆에 뻔히 평생 친구와 도박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흉내요 어른스러움의 장난인 것이다. 경주 불국사를 구경하고, 근처 유스호스텔에서 화투를 치는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슴이 단풍나무 숲 사이를 뚫고 나올 형세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금방 어른이 되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과 사는 것이 전부이다. 어렸을 때는 영화 보러 가는 것이 기뻤다. 그것은 어쩌면 동급의 국력을 가진 나라의 편안한 외교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영화 보러 가는 것은 별로 기쁘지 않다. 그것은 뱀프 같은 짓. 뱀피도 있고, 피프도 있고, 비프도 있는, 누구도 시험의 문제로 가치 상승시키지 않는 우리 안의 기호질, 학생의 근거가 내비치는 것이긴 하지만, 교육문화청에서 자금과 예산 관리가 투명치 않는 어용대학이라면서 문을 닫아라 명령이 떨어진 지방의 중소도시 같은 것이다. 뱀프와 프라이드는 엄청 차이가 있다. 뱀프는 뱀파이어 영화를 가리키고, 프라이드는 자부심이나 프라이드 치킨의 줄임말이다. 만일 우리가 도시인으로서, 영화관에서 뱀파이어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프라이드 치킨을 시켜먹는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도박을 하는 것을 도모다치, 친구 찾기라고 내가 해석한 것처럼, 뱀프 영화를 보고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것을 친구 찾기라고 다시 해석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자판은 저항한다. 손가락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친구 찾기는 무엇인가? 친구를 기어코 찾았다 하자. 그는 어선에서 물고기들을 하역하고, 그물을 대충 정리하고 있었다.
삼득아.
그는 민중의 어둠 얼굴을 하고 있다가, 눈에서부터 소년의 기분을 회복한다.
용팔아. 너 이 새끼. 여기 왠 일이야?
뛰어내린다. 그리고 껴안는다.
너 보고 싶어서 왔지.
그는 갑자기 함경도 사투리를 썼다.
증말?
정말이지 않구.
둘 옆으로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소나무 언덕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파도는 파멸을, 누군가 국어사전을, 염소는 종이를, 흙은 오래된 소나무 잎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작고 이름 모를 항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운대에도 있다. 해운대 백사장과 더불어, 옆으로 난 기다란 소나무 숲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미학을 알지 못해서 숨이 가빠진다. 의사선생님. 이건 뭔가요. 숨이 가쁘고, 열이 나요. 어느 걸그룹의 노래 가사가 그러하다. 나무와 숲. 나무와 바위.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마치 사진기의 해상도를 극대화하는 듯한 시각적 요소로서의 솔잎들. 미칠 듯한 솔잎 향기. 전주비빔밥 되는 바다 향기. 인피니티..... 둘은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하고는, 그날 저녁 지지 않는 애프터 스쿨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일어나는 작가의 아침은 다시금 스쿨에 포위되지 않을 수 없다. 스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골 아버지가 아들의 등록금을 위해 소를 팔던 스펙타클에 있는 것일까? 얼마나 그것을 우리는 배반했는가? 배반한 것과 하지 않는 것들의 그래프. 영웅은 배반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엑스축 그 자체이다. 학창 시절, 작가는, 작가의 주관은, 만주를 만났고, 이육사의 강철로 된 무지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국어 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맞춰보는 것도, 이육사와 윤동주의 피가 떨어져 있는 것들을 토대로 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삼득이는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고, 둘은 서로 인간의 대지 위에서 탑이 되고자 했다. 이 말이 지나친 게 아닌 것은, 그와 같은 문장으로 가부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지극한 마음에 접근해 들어간 한국 소설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이 가장 교실 냄새 나무 냄새가 나긴 하지만, 어떤 교과서를 쓰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두환과 이순자가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점심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해서, 집에 와서 점심을 또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야칭, 속칭, 존재에 대한 용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라고 한다. 후자는 수학적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철학이나 신학이 그것을 담당한다. 학원문학에서 교과서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작가 자신이 존재에 대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전두환과 다를 바가 없다.
작가는 착한 전두환과 이순자를 향해 인사를 하면서 길을 떠난다. 그것은 해보았다면 해본 것이고, 안해본 것이면 안해본 것이다.
그는 밀항을 한다. 이것은 가능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밀항을 꿈꾸는가? 그것은 헤겔의 이성 국가도, 맑스의 정치경제학도 아니다. 사실 어떠한 철학도 밀항을 담당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소크라테스도, 그의 철학 정신 그 자체로써 독배를 마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우리는 적어도 동독만큼은 철학적이지 않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독일 이름들은 한동안 비스마르크 다음에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예술가들과 철학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부터는 알 수 없는 실체를 만나는 듯 했다. 동독도 부강하고, 서독도 강부하면, 참 멋지다 하겠지만, 서독이 무너질 때, 그것의 객관적인 지표는 그럴 수밖에 없음으로만 집중되었고, 하는 말은 통일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 뿐이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경제적 리포트라는 것은, 철학의 기초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들이 통일을 왜 했는지도 이제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앞으로 뭐가 되겠다는 국제적인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사각형이지만, 오로지 에테르와 공으로 이뤄져 있고,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중립적이기 때문에, 총알 같은 것으로 집중되게 되어 있다. 총알이 먼저인지, 이와 같은 물리기하학적 연금술이 먼저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가 없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 단장의 아픔 같은 것. 그런 것이 그 비슷한 부류이다. 야쿠자 영화가 먼저인지, 야쿠자가 먼저인지, 가장 정확하고 낭비가 하나도 없는 표현이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야쿠자 영화를 찍는다. 느와르라고 하면, 헌책이 눕혀진 느낌이다. 야쿠자라고 해야, 모나드와 허공과 총알의 자연 생성의 느낌이 있다. 일본은 일본말로 야쿠자 영화를 독점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만 가업을 이어받은 것일까? 아니면 일본인의 일본식의 불만이 죽기 전에 잠깐 숨을 쉬는 것일까? 밀항은 영화적 기법으로 하면,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같다. 밀양은, 우리나라 전체 지명으로 날아온 총소리와 같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라는 것이 있다. 밀항이 먼저일까? 아니면 밀양이 먼저일까? 광주가 먼저일까? 밀항이 먼저일까? 삼국사기는 밀항이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밀항과 그것의 유사함이 있다. 왕들의 이름은 똑같으나, 내용은 하나도 같은 게 없고, 주제와 색조로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두 개의 정신이 비좁은 한반도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에 별다른 문학가나 세계적인 철학가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객관적인 신비의 요소로도 밥벌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람들은 신비를 좋아하고, 특히 시각적인 효과 에프엑스 일레트릭 쇼크 같은 것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문학도 그러하다. 기본적으로 밀항 같은 것. 사랑의 도피 같은 것. 그런 기본적인 세계관을 언급하거나, 범주적인 관심으로 놓거나, 아픔의 일반 원리에 대한 반복적이며 보다 접근적인 표현들을 축적해야 하지 않나 한다. 최근의 한국영화 '황해'가 밀항을 복잡하게 다루었다. 중국 한인이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뜨겁지 않다. 한국에서 내내 잘 지내던 사람이 밀항이, 밀양이, 영남루의 왠지 모르게 밀항할 것 같은 고건축에 눈이 가는 것을 그려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밀항하겠는가? 그와 같은 파워엘리트가? 일본뿐이지 않겠는가? 사랑의 도피 같은 것. 그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사랑을 못하게 하는 집단이 한국에 있어야 하는데, 여자가 가난한 예술가를 싫어했으면 했지, 좋은 나라에서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것 같다. 돈이 없었으면 없었지, 여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일본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밀항도, 사랑의 도피도, 문학의 영원한 소크라테스적인 주제인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밀양만이, 작고, 영남루 하나만 있는 경상도 내륙 도시만이 왠지 모를 불만을 안고 있을 뿐이다.
그는 누구도 밀항한 것인지 모른다. 페리호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해서 후쿠오카에 도착했고, 작은 호텔에 숙박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면 여행이고, 혼자면 밀항이다 하는 구분이라도 있으면, 혼자세요? 밀항하셨네요? 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니 국가 경제가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한국에서 못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할 수 있다 하는 경우,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만 해도 한국에서 큰돈을 번 것과 같다 하는 경우에는 밀항이라는 영원한 테마가 발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배가 부르면, 일본에서도 배가 부르다. 최근에 엔고가 발동된 이유도 단순하게는 그 때문일 수 있다. 한동안 한국에 일본 관광객들도 적게 왔다고 한다. 물가가 차이가 없어서. 한류만 아니면. 아주 조금, 관광객이 오는 것이 엔고 때문이란다. 먹고 자고, 행여 옷을 구입하는 호사를 누린다고 하면,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아무런 차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거리는 깨끗하고, 서점이나 음반 가게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언젠가 배가 고프게 될 텐데, 일본에서 배가 고픈 것이나, 한국에 다시 페리호를 타고 돌아가 배가 고픈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일본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나라라는 아이템만이 차이를 가능케 한다. 언제부터 오사카 성이 그럭저럭 보였던 것일까? 뱀프 영화를 보고, 집에서 프라이드 치킨 시켜 먹고 할 때는, 우리는 피아노 소리에 있었고, 나는 내 마음 속의 아사코를 생각했었다. 성의 입체는,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은 위대한 개성과 예술의 합성으로 보였다. 저녁 다섯 시 반을 장악할 때, 일본의 세계 고전 만화가 어린아이들의 통행금지를 만들 때, 나는 자유로웠고,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나의 미래는 어마어마한 미래도시의 풍경처럼 수많은 건물들과 공원들 신비로운 자동차들과 여러 경기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 적어도 근현대사, 그리고 경제와 문화, 적어도 영화를 잘 아는가? 일본은 아름답고, 부자이다. 출판물은 하늘까지 솟아 있고, 자동차와 오토바이 생산으로는 어쩌면 세계 최고이다. 드라마의 활력으로는 일본을 따라올 나라가 없다시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을 직관케 하는가? 야쿠자 영화는 일본의 할복자살 같다. 직관에 대한 의지인가? 아름답고, 정적이며, 미장쎈에 신경 쓰면서 야쿠자 영화를 찍는 것이 인간 정신사에서 별종 같은 것으로 발생한 것일까? 보편적인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용팔이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교토에 왔다.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많이 왔다. 직관에 대한 의지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날아오는 총알을 니뽄도로 가르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이런 장면은, 영화 속에서 이미 선취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뽄도는 무엇인가? 책임 있는 철학이 아닌가? 물론 상대적이긴 하다. 그러나 키는 작고, 걸어 다니는 무사가, 그림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가 건너는 무지개 다리는 비가 내리고, 판화 속의 인물은 참으로 산업 사회의 풍경을 먼저 그린 것 같다. 과거 사람들이 착하고, 지금 사람들이 안착한 것이 아니다. 무사 시대에도 무사들은 넘쳤고, 그들에게 도가 깊다는 말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오직 일본에서만이, 무사도는 기계 문명과 싸웠고, 기계 문명으로 발전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그와 같은 마음을 인정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에게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무사와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야쿠자는 사람을 쉽게 죽인다. 고문도 하지만, 총으로 죽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압박이다. 칼을 쓰는 것과 총을 쓰는 것이 시간적인 면에서 차이가 커서, 인간적인 생각이 칼을 쓰는 것에 좀 더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유치하다. 다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소명의 기회를 갖는 것에 마지막 생명의 빛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훈련받은 보폭대로, 어린아이 때에는 뛰어놀던 산과 들을 서로 싸우면서 달리는 초단위의 낭만이 칼을 쓰는 것에는 있다. 우리에게 철학이 없는 것에 대한 취조실에서의 소명의 기회는 박탈당하고 만다. 철학이 정말, 철제의 투구와 갑옷, 칼을 두 개 세 개 갖고 다니는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철학이면, 철광석을 영원토록 가장 많이 품고 있을 이 지구가 가장 철학적이겠다. 산업시대는 무엇이겠는가? 지구에게서 지능을 잠시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지구가 생명이고, 사랑과 생각의 영원한 대상이면, 절대적 목적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항진명제는. 그러나 지구를 가리키는 피곤한 시심이면. 그렇게 겨우 그치는 것이면,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말들은 반드시 거기서 거기가 된다. 인간의 생명은 무한한 가치가 있고, 시는 무한한 가치 위에 비행하는 거대 무한이 된다. 지구에 아부하는 말들이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내가 숱한 개발권들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 아니래도 그러하다. 지구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가? 하늘에서 보면 모두가 전두환과 이순자인 것이다. 그와 같은 순간에는, 생명은 연장이고, 프로젝트 같은 것이다. 영원토록 계속되는 헬리코 닥터 파일로리균 같은 것. 내일은 또 커피가 어떠한 단점이 있는지, 장점이 있는지 보고가 될 운명에 우리는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생명은 요소의 위협이다. 먹는 것 갖고 장난하는 사람만이 미운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우리의 가난한 반응이 미운 것일 수 있다. 라면과 김치가 상극이라는 말도 들었다. 니뽄도가 뭣을 썼을까? 그것의 오브제는, 가능하고, 이미 본 것만으로도, 해석의 날이 이렇게 들어간 뒤에는 감정의 격렬함을 끄집어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교토는 아름답다. 일본은 이런 충분히 가능한 목조의 아름다움을 놔두고, 보다 산업화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게이샤 출신의 근대 여성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애니는 역사가 아니다. 게이샤는 화장을 두껍게 하고, 아주 화려한 옷을 입는다. 부정적 궤도로 들어가는 표현과 습관은, 운명 같은 것이다. 한국 예술이 이상한 예리함이 떨어지는 것이, 칼이 가져다주는 기본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그것의 처음은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부끄럽게도 여기는, 대신 육모방망이 같은 기질이 있다. 여자 무사라는 것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 아닌가? 갠지 모노가타리는 솔직하다. 여자들은 거세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문왕적인 느낌의 주인공의 방문을 격렬하게 사모하고, 그리워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본은 경제력이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환상 때문일 것이다. 팔십점을 맞는 운명의 사람이, 백점과 같은 팔십점을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 것이. 한국은 백점을 맞을 수 있다. 그것의 거대한 섬과 같은 악은, 대마도는, 대체 누구에게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인가?
총알 탄으로서의 현해탄일 뿐이다.
우리의 직관은 비오는 날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칼의 역사가 수천 년인데, 마지막 무사의 인격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용팔이는 부산 오기 전에는 언더월드 4편을 보았고, 일본에서는 영어로 아웃레이지라는 야쿠자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것 말고는, 그 거대한 공백과 같은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거저 먹기 같은데, 뱀프 영화에서는 총도 쓰고 칼도 쓴다. 사람들이 제법 날아다닌다. 야쿠자 영화에서는 총을 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게의 경우,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죽어나간다. 그것이 중요하다면 중요한 것이고, 별로 중요치 않다면 중요치 않은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 같은 것이다. 동작은 생각의 수십 겹과도 같다. 야쿠자 영화가 먼저인가? 야쿠자가 먼저인가? 내가 제안한 명제에 가장 접근한 케이스인 것이다. 누가 태어나면서 야쿠자가 되기를 결심하는가? 그들도 헤겔의 이성국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한국은 자기들보다 더럽고, 무수한 학생들이 죽을 것처럼 공부를 해서 소망이 곧 실현될 위기의 시간에, 가장 위력 있는 카드가 그것이 아니겠는가? 요요기 체육관에 모여서, 그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 것이다. 무가치와 죽음 앞에서, 야쿠자보다는 칼을 쓰고 싶은, 그 유치한 바가지 같은. 야쿠자 영화를 보는 것이 야쿠자가 된 것의 증거라고 한다면, 얼마나 야쿠자 영화 안보기에 단지를 걸겠는가? 단지를 하고 보게 되면, 그것의 댓가라도 얻어내려 하는 야쿠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나의 이런 말투가 이미 야쿠자의 한 인물 같다. 문장의 물음표는 총알과 같다. 잠시 돌아보면, 매우 밀집되어 있는 것이 내게도 야쿠자 기질이 이미 있음이다.
야쿠자가 뱀프를 이긴 것일까? 그리고 칼의 문화가 일본에 저장된 것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내 동생에게 말하고 싶다. 하긴 절대적인 철물은 없는 것이니까.
뱀프는 만화와 같고, 야쿠자는 만화방과 같은 것일까? 빠가야로. 멘독사. 우라기니모노. 빠가야로.
그렇다.
만화방 없는 만화는 있을 수 없고, 만화 없는 만화방은 있을 수 없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신칸센을 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비가 온다. 우리는 비가 내릴 때 죽음을 예감한다. 우산살이 정확하지만 미약한 것이 꼭 우리의 숨결 같다. 도쿄역에서 내려, 세계에서 가장 큰 타워를 구경한 뒤에, 돈까스를 먹고, 가장 큰 만화방에를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야쿠자 닮은 넥타이 맨들이 오가고, 만화방에 만화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 제브라맨이 되지 않겠는가? 이 단어에 야쿠자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일본에 보다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브라맨은 세상의 숱한 맨 중에 가장 재미없는 맨이다. 나는 옛날에, 서울이나 수원에서, 제법 화려한 백화점의 마스코트나 디자인이 얼룩말인 것에 놀랐다. 매우 선진적으로 보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광주고속은 거북이. 중앙고속은 사자. 광주고속은 사연이 많고, 왠지 모르게, 이솝우화나 철학적인 느낌이 있었다. 사자는 살짝 진부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북이와 제법 멋진 한 쌍을 이룬다. 얼룩말이 그려진 백화점에서, 쇼핑은 어렵고 힘들지만 마음 싱싱하게 귀가하는 모습이란 정말이지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새랭게티인 것이다. 제브라맨은 그것을 배반한다. 그는 남자이고, 피곤하며, 독일어로 마하트가 갖는 이념적인 도로가 조금도 닦여 있지 않다. 엉겹결에 뮤턴트가 되었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변신에의 분위기 환기가 없으며, 이전과 똑같이 짓눌려 있고, 뭐든지 마땅찮다. 그것은 제브라맨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만화들이 있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면라이더는 벌써 십수 명이다. 이런저런 울트라맨, 전대들까지 합치면 셀 수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도쿄에는 만화방이 있고, 없고, 만화가 없는 것일까? 제브라맨은 속성 낮은 뱀프의 기운조차 이겨내지 못한, 정식으로 사회생활하고 있는, 저녁에나 모임에 참석하는, 직책 낮은 야쿠자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라도 놀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한국은 무엇이겠는가? 깨끗해 보이는가? 쓰레기봉투는 거리에 널려 있고, 과연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지 그 누구도 관심을 갖거나 민선시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잘 모르는 이름 같다.
만화책을 보고 나면 허무함이 걷잡을 수 없어진다. 종말은, 종말이라는 감각은, 성실하고 표현력 넘치는, 적당히 야하지만, 못지않게 경건한 일본 만화가의 일본 만화를 본 뒤에, 그보다 낫다 낮다 가늠할 수 있는 영화나 문학 심지어는 철학이 없는 심리적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종말은 성리학 같고, 모든 개념은 파자 같으며, 처음에는 성리학이니까 性이 곧 이치다면서 성즉리를 외쳤다가, 나중에는 심즉리를 주장한다. 마음 심.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것이다. 중간이라도 가고 싶은. 그렇다면 성리학은 심리학이겠다? 그래서 그것의 뻔한 범주는 성기학과 심리학을 목도한다. 그래서 성리학은 철로의 외길 걷기일 수 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나는 그것을 슨슨감이라고 한 적이 있다. 철로의 반들거리는 철면은 전혀 녹슬지 않았고, 거기에 한발씩 앞으로 내밀면서 전진하니까. 어느 세월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겠는가? 동양화는 만화와 같은 종말을 벗어날 길이 없다. 은빛으로 빛나는 매그넘을 하나 들고, 헤겔의 이성국가. 헤겔의 이성국가. 하면서 주변의 떨거지들부터 즉결처분하는 이성국가의 파자와 같은 야쿠자가 그래서 일본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총도 있겠다. 야쿠자도 있겠다. 성기학 하고 있는 성리학자들이 목불인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가?.... 혼또니. 도코니 이룬다.....
현해탄과 같은 이성계.......
성리학보다 강력한.......
理性界
나는 광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온 뒤에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신대학교에 갔다.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내가 마치, 동경에 있는 만화방에 간 것처럼 여겨진다. 처음부터 나는 밀항을 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광주가 좋았고, 전대가 좋았다. 여기서 전대는 전남대학교를 가리킨다.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최근에 나는 한신대학교까지 일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다. CB600f 99년 모델이다. 내장산 돌아가는 길에서 한번 쉬면서, 마치 한신대학교 합격한 시절의 아침 습기처럼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것을 바랐는지 모른다. 관념은 충분히 내 안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고전적인 고전이던지, 프랑크푸르트학파던지. 그들은 내게, 어떤 철학적 물체를 올라타고 비행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NHK, CCTV의 '실크로드'가 그것이다.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 행렬을 갖추고는, 이런저런 그 당시로는 오지를 방문하는 것을 나는 집에서 혼자 보았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성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것의 방향은 양갈래 길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입체는, 그것은 내용인가? 아니면 형식인가? 나의 육체를 부위별로 다시 조직하는 것 같았다. 머리는 머리로, 가슴은 가슴으로, 아름다운 팔과 다리는 팔과 다리로, 물론 성기는 성기로. 그것은 아직 미발달했었다. 그렇게 다시 조직하면, 가슴은 뚫리고 정신은 맑아졌다. 내게 초월적인 욕구의 전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금상첨화에 있었다. 더 정신이 맑아지고, 철제에 올라타고 싶었다. 관념과, 헤겔적인 개념으로서의 탄환을 날리고 싶었다. 아직도 즉자대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한다. 물론, 사용처가 아니다. 헤겔적인 연결에서나 그 말은 유효하며, 우리의 일상은 그것보다 결코 낮지 않는 개념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즉자대자를 알았다. 그것은 ‘존재는 무다’는 명제에 비근하는 것이다. 아무런 뜻도 없다. 더 이상의. 그러나, 윤일상의 한국 노래들처럼 제법 아무런 데에서도 따라오고, 이미 있으며, 나의 절반과 같은 여자들을 포섭하고 있다. 즉자대자는 그것과 같다. 장화와 홍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휴지를 던질 것이나, 이병우의 ‘돌이킬 수 없는’ 소품을 동시에 싸잡아 말한다면 이건.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자포자기, 즉자대자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아직까지 이런 데에는 아무런 착안점이 없다. 그러나 내가 아카데미를 무시하느냐? 그렇지 않다. 나는 아카데미를 보고,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 그러나 즉자대자, 이병우의 ‘장화와 홍련’ 테마도 사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계 문명은 과연 이와 같은 것과 동시동작적인가? 그것은 일종의 축구장에서의 헛발질이나, 자동차의 위험한 급발진 같은 것이 아닌가? 해마다 도요타 자동차는 수만 대를 리콜하는 드라마를 찍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도요타 자동차 회사 사람들은 즉자대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호가 매우 미약하고, 없음은 얼마든지 위협이 되며, 그래서 발생하는 원한은 끝이 없다. 피매친......
실제로 나는 만화방에 갔다. 수원에는 좋은 만화방이 많았다. 지금도 그럴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한 서너 개는 된다. 여기저기. 읽는 이는 모르나, 내 마음의 사진들.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그것도 대학인줄 모르고, 영화나 책을 사러가다가 한두 시간씩 만화책을 보고 오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야한 만화책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졌다기 보다는, 기분이 높아졌다. 빛이 다시금 강렬해졌는데,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처럼,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존재의 불가피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만화의 선험적 종합 판단을 따라갈 수 있는 시와 소설이 있겠는가? 소설 속의 말은 많고, 잘 모르는 관계들과, 특히 한국사람 이름들. 내가 그들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드라마를 보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무슨 신뢰로써 상대하겠는가? 뱀프 같은 불신감은, 그런 구조적인 에이도스가 뻔한데도, 작가 자신에게 먼저 누적이 되어서, 소설 스스로가 음산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문예평은 그것을 따라 또한 음산해진다. 그러면 출구가 무엇인가? 저능한 전경유착이나, 교권 비싼 등록금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비싸다는 것인가? 오직 메터리얼 밖에 비싼 것이 없다면, 그것이 롯데 백화점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 눈에 보이는 싫은 것들을 향해서 벌써 물음표를 네 번이나 남발했다. 네 번이나 맞힌 것인지, 네 사람을 쏜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이란 장르가 급한가? 문예평이라는 장르가 급한가? 늘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그와 같은 플라시보에 진입하기를 좋아한다. 사실 뜯어보면, 소설이 아주 이런저런 사물과 인물에 대한 문예평 같고, 문예평은 누적니적 소설만 같다. 거기서는 철수도 놀 수 없고, 영희도 놀 수가 없다. 계속해서 그릇 없는 해안마을로 쏟아지는, 그것은 소설인가? 아니면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돈호법 같은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가고 싶은가? 우리는. 도코니 이룬다.....
아름다운 음악은 거리에 넘쳐 있다. 흔한 음악 중에도 많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도 많으며, 얼마든지 실험적인 것에서도 자기 재미를 구할 수 있다. 소품은 우리의 의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 만일 대품이 의식과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대품이 있느니만큼, 어떤 사람의 가벼운 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들의 영예를 직관할 수 있는 것이다. 우연히 닭이 물에 빠졌다가, 오리처럼 재빠르게 나오지는 못하나, 어떻게든 나와서, 온 몸에 묻은 물을 털어내는 것. 강아지도 마찬가지. 프레드릭 쇼팽. 혹은 프리드리히 헤겔. 우리는 거대함에 거짓으로도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충분히 거대하고, 막대하며, 비중이 높고, 임무는 막중하다. 그것의 가장 연결고리가 높은 것들이 영어와 기술 지식일 것이다. 청년들을, 그 딱딱한 기술논리학의 책에 집어넣고 갈게 되면, 취직이 되고,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릴 수가 있게 된다.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들은 다시 해외여행을 가고, 집을 새로 사고, 차도 새 것으로 바꾼다. 드라마를 보고 짜증을 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드라마가 그들의 초자아를 건들지 않는 것으로다 근본적으로 거세된 것으로도 생각한다. 남자의 자부심을 자극하면, 비싼 차를 자기 멋대로 사올 것이며, 아내가 뭐라고 하면 타고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다. 여자의 모나드를 남자가 무시하면, 비싼 명품 백을 그 날로다 살 것이고, 그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차단된 남자와 여자와 대판 싸울 것이다. 처음에는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자기도 비상금으로 오토바이라던지, 심지어는 바람까지 피웠다면 말이다. 그러나 남자가 혼자만의 위기에 접어들 무렵, 그때에도 여자가 한가로운 인정투쟁을 하고 있다면, 폭력적인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의 꼭지점은 무엇인가? 아들이 어느새 자라서, 해외 유학이라도 가면, 우리는 더 이상의 고집을 피울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음악적 대품들은 그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뭔가를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 말하는 것이 없다. 음악처럼 수동적인 절대성이 없다. 그것은 한국 도로공사 같다. 뚫려 있으니, 좋으나, 갔다오면 우리의 마음은 시퍼렇게 멍든다. 음식 갖고 장난하는 사람이, 그와 같은 카타르시스의 한정자산 속에서, 일종의 뉴스메이커로서 나쁜 역할을 자청하는지도 모른다. 맛이 없다가, 없다가, 있는 경우. 그것의 반복. 도배질. 그것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러다가 자동차 여행을 하다가. 우리는. 한계령의 안개처럼.......
신대루하는지 모른다......
닭강정은 뱀프 같고, 치즈 만들기 체험은 야쿠자 같다.
반댄가?......
어이 아카데미......
말 좀 해봐......
일본은 영원히 잠재태가 될 수 있다. 단 한 번의 현실태가 아니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나라요, 도시를 많이 갖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클래식은 언제나 어색하며, 드라마는 왠지 모르게 막혀 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본뿐이다. 내가 얼마나 일본을 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의 양적 구조 때문에 만천하에 폭로되고 있다. 화순 운주사에 누워 있는 불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와 같은 에이도스로 끝을 맺을 수 있다. 아주 미터법적으로다, 그것의 위치는 인간의 일상적인 높이 위에 있다. 그러나 나무는 그것보다 높아 있고, 당연, 아래서 천천히 올라서 보는 사람의 눈 높이 아래에 있다. 그것은 조금 의외이며, 우리의 무의식에서, 과연 그와 같은 양궁에서의 화살이 불스아이를 맞히는 바람에, 기분이 좋기보다는, 화면이 무질서해지는 것을 경험하느냐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주 가난해져 있는데, 우리나라 말 밖에 모르고, 그것은 민중, 배고파서 구걸을 할 때 그나마 소통과 양심의 황금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것은 실험의 실험이다. 바위에 흐르는 물처럼, 발음상으로도 척박한 그 어떤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내 나이 먹도록, 영어보다 일어를 더 잘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래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어를 더 잘하고, 영어로는 헤겔도 읽을 수 있고, 백과사전도 다 읽을 수 있으나, 일본어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고, 책 읽기는 더더욱 생각도 못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의 동시동작적인 지표라면. 나의 부가, 이미 꽉 짜인 정신의 궤도를 영원히 순환한다면. 헤겔의 존재론은 무엇인가? 독서의 위대한 지평이 아닌가? 성경은 이사야 같고, 그것에 대한 비판은 신학자들은 할 수가 없다. 남미 학자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칼을 서로 힘으로다 즉자대자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본어로 칡쇼하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미친 것들. 미친 것 아니야? 하는 소리도 떨어지면서 터져 나온다. 그것은 다만 학자와 같은, 거울일 뿐이다.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 주체의 가난까지 도달한 것 같은 착각. 소설적인, 음악적인, 대품적인 만족감. 일본어를 잘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의 삶의 연속으로는. 일본은 위대한 예술가가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는. 깊은 착각 속에서는......
나는 수원에서, 그것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맛은 공기와 같다. 거리는 맛집들로 가득차 있다. 나는 두렵다. 맛이 없을까봐. 그것은 거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남이 데려가 준 집에 가며, 햄버거집이나, 김밥집, 편의점에 간다. 내가 스스로 찾아 들어간 일반 음식점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밥을 먹고, 공부를 적당히 하는 삶의 에이도스. 하숙집이 좋고, 고시원 식당이 좋다. 선입견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있다.
그날도 나는 햄버거를 먹었을 것이다. 그것도 무슨 행사를 하는 것으로. 그렇다면 천원 가량이 세이브 되었고, 영화 값은 오천 원 가량이었을 것이다. 영화나 만화방에 가려고 서울까지 가는 경우는 없다. 다만 큰 서점에 갈 일이 있거나, 서울에서 친구를 만날 때나 그러했다. 먹고 대학생은 오후 수업이 없을 수도 있다. 그와 같은 데이비드 호퍼와 같은 시각에, 나는 생으로부터 일탈되었다. 헤겔은 나의 안테나처럼, 닭벼슬은 진부하니까, 나를 날씬하게 하였고, 색감을 늘 조절하게 하였으며, 그렇게 빼어난 용모의 박지윤 같은 여자를 나의 영채로 두게 하였다. 그녀가 경희대 수원 캠퍼스 포스트모던 음악과에 다니던 쪽 사진들을 잊지 못한다. 그렇다고 보면 한신대와 매우 가까운 것이었다. 한신대는 종합대학이긴 하지만, 예술대학이 없다. 그것은 한신대가 예수 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 대학이면 됐지, 이런저런 욕심 때문에, 전두환 이순자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 타는 오토바이를 그때 갖고 있었다면, 나의 의지가 어떠한 장애나 눈치 없이, 경희대 다니는 박지윤을 만나러 가는 투어를 감행했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고집이 있었다. 예쁜 여자는 경건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유두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여자의 유두 없이 살 수 없다. 그렇다고 많이 만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누르는 초인종만큼만 만져도 된다.
나는 나의 학문적 형상을 충분히 달성하고 왔다. 남이 찍은 영화들이었지만, 사람은 템포로써 창작을 도모하는 것이다. 창작을 도모하는 것은, 참 예술을 꿈꾸는 사람은 이미 예술가이다. 선별.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처음에는 그것으로 술을 사먹던지, 옷을 사입던지, 구분이 되지 않겠지만, 지나고 나면 보다 형상에 가깝고, 예술은 어쩔 수 없이, 선입견, 순발력, 선착순 같은 형식을 강요한다. 수원에서 한신대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나의 참모습이었을까? 아니면 한신대에서 수원으로 나가는 모습이 참모습이었을까? 나는 이런 말로도 예쁜 여자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원한다.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말을 특허에 넣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 넣지 않아도 되겠지만.
결국 존재와 무의 실재적인 상이성을 안고 있는 한낱 규정적인 존재나 혹은 현존재만을 머리에 떠올리는 사유나 그보다 더한 관념, 표상 따위는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순수한 학의 시원으로 생각을 돌려야만 하겠으나, 실은 파르메니데스야말로 자기의 관념과 그럼으로써 또한 자기의 후대인들의 관념까지도 존재의 순수사상으로 순화하고 또 고양시킴으로써 철학의 지반을 창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다시금 우리의 중심 문제로 돌아가려는 마당에 언급해 두어야만 할 것은 존재와 무에 대한 고찰에서 얻어진 결과가 나타내 주는 것, 즉 ‘존재와 무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라는 명제의 표현 방식은 어딘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악센트가 주로 단 하나의 동일하다는 점에 주어짐으로써 결국 그 의미하는 바는 구별이 부인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은 이 명제 속에서 구별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제는 존재와 무라는 두 개의 규정을 언표하는 가운데 분명히 그 두 규정을 구별된 것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여기서는 존재와 무라는 양자가 사상되어 다만 그의 통일만이 고수돼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겠다. 즉, 그와 같은 해석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상돼야만 하는 것이 또한 그 명제 속에 뚜렷이 모습을 담고 있는 한, 모름지기 그 입장 자체가 일면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비록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명제가 바로 이 두 규정의 동일성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 명제는 양자를 구별된 것으로 내포하는 까닭에 어느덧 이 명제는 그 자체가 모순을 빚으면서 어느덧 그 스스로가 해소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것을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어느덧 여기에는 자체적인 운동, 동력에 의해서 자신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명제가 정립돼 있는 셈이다. 여기서 마침내 이 명제 속에는 그의 본래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 즉 생성이 야기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이렇게 옮기고 나니, 별로 특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읽는 순간에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철학책이라는 것은? 어쩌면 철학책은, 특히 존재론은 음악과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파르메니데스를 읽는 순간, 나는 심은하나 한석규가 떠올랐고, 군산 시내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초원사진관, 그것들이 떠올랐다. 성철스님도 떠올랐다. 그것의 존재는 너무나 진부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독서가 가능하다면, 심은하도, 성철스님도 다시금 생성되게 되어 있다. 말은 제주도에 보내고, 사람은 헤겔 책을 읽게 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중첩되어 있고, 높이라던지, 깊이라던지 하는 것이 중첩일 수 있다. 내가 최근에 오토바이를 타고, 화성이나 서울을 다녀온 것이, 마치 높은 곳에 있다가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 그 때문이다. 나의 깊이와 높이가 거기에 저장되어 있었고, 다만 평지를 질주한 것 뿐인데, 숭실대의 그 엄청난 언덕처럼 기분이 묘한 것이다. 소설은 중첩인가? 아니면 높이인가? 헤겔의 문장은 그것을 가리킨다. 옷을 더욱 희게 입게 하고, 생각을 보다 투명하게 한다. 재산은 영화적인 소재일 뿐,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그 존재가 지극히도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원에서 병점으로, 병점에서 걸어들어간 적이 있다. 지금은 병점 아래까지 전철이 다닌다. 수원역이 일호선 종점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오후 몇 번 있는 학교까지 바로 가는 버스를 타지 못한 경우, 병점을 지나는 버스를 탄 후, 병점에서는 걸어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은 뭐든지 선용하고 있는 자기를 보면서 뿌듯해 한다. 병점에서부터 걸어가는 길은 학교 다닐 때부터도, 그 이전 사람들에게서도, 낭만의 극치라고 칭찬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만은 미세한 관계이다. 털이 벗겨진 닭처럼, 혼자가 극단적인 맹자 상태일 때는, 오래 걷거나 고생하는 것이 싫게 마련이다. 글은 낭만의 극치이다. 죽기까지 낭만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싫게 되어 있다. 그것은 신라. 죽기까지 백제하기로 약속하지만, 하루 지나면 신라. 싫다는 말이다. 낭만은 그것의 두 얼굴과 같다. 우리는 낭만 없으면 살 수 없다. 그것은 존재와 무가 같은 것이다는 주장에 가장 접근하는 것이다. 모리꼬네의 러브 띰즈가 뒤따라 주면 좋다. 그것은 헤겔을 읽었던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대목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랐다. 우리 이런 관념의 배경은 어디일까? 나는 정동진이라고 생각한다. 경기도는 숱한 정동진과 같은 눈들로 내려가는 것 같다. 누군가 가난한 자산이라도 불려서, 건물을 짓는다면, 그것의 모퉁이를 광주에서 오랫동안 지내는 중에 꿈에서라도 보게 되어 있다. 병점에서 내리는 버스 승강장. 철로를 건너는 다리. 존재와 무는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동작을 행하고, 길을 가는 기쁨이라는 것은 존재와 무가 같다는 언어적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남의 건물을 내 집처럼 들어가는 기분이란, 거기에 있었다. 한신대생이 한신대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거기서 철학책을 오후가 깊어가는 시간에, 학교 강의와 동시성적으로다, 약간 배가 고파지도록 읽는 것은 예술 대학 엘리트의 기쁨이다. 학교도 주변인데, 그것의 주변에서 나는, 건물을 가로질렀다. 길이 빨라진다면, 한 이미터?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층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존재는 존재이고, 무는 무다. 그것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대단한 기쁨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와 같은 짧지만, 템포 많은 김태희가 좋았다.
프렌치까페 까페 믹스......
어린 우리들을 홀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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