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모든 것들
알튀세르가 서울 한복판에서 안티휴메니즘을 내세웠을 때, 나름 히트였었다. 그것에 논리가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의 불시착, 청소년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단순한 말을, 나름 복잡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사이에 집어넣으니, 효과는 있었다. 우리는 효과라는 말도, 효꽈 그렇지 않고, 효과 그런다고 배운 적이 있다. 그래서 유도에서, 한판, 절반, 효과, 그렇게 발음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발음할 때마다, 효과, 그렇게 들리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은 사람들이 열심히 유도하고 있는, 방송통신대학 같은, 어떤 샤인머스켓 음료수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었다. 알튀세르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수사학이 장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대하나, 결국 아무런 도달점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매우 비극적인 전기를, 어쩌면, 탑 클래스의 전기를 살았던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철학자의 말보다, 철학자의 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가 다시금 철학자의 말이 중요해지는 때가 오는데,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그를 그렇게 가혹하게 내몰 만큼,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절 없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나는 니체가 다른 삶의 구석에서 매우 잘 살았을 것으로 여기지만, 그런 식의 수사학적 능란함이 있지만, 그래도 알려진 바로는, 혼자 죽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내몰림을 당하는 것은, 인간들이 너무 휴메니즘적인 자의식이 지나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니체를 통해서, 사탄이 요구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니체도 인간이고, 알튀세르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만큼 예민해진 것이다. 니체는 부정확했고, 사람들은 휴메니즘의 기치로써, 그를 따돌림했다고, 그러니까 그것들끼리 전선이 너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어, 알튀세르는 일종의 그런 말들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입각점이나, 상투적인 비판이거나, 가난한 철학자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로는 여겨지지 않고, 어느 때는 매우 숫자적인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숫자였고, 인간이 아니었고, 알튀세르가 발언한 것도 일종의 숫자였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땅세, 그런 분위기의 음악이나, 어떤 연출, 그런 것들의 연결이 지배했을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는 행복했기 때문이다. 지방시. 그것은 지방을 뜻한다. 그것도 숫자이다. 우리가 좋은 한국 노래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만큼 아름다운 숫자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 그것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에세이스트가 없다 보니, 한 소절이 끝나고, 다시 한 소절이 진행하고, 간주가 들어오고, 그런 통속적인. 결국 우리는 나카산 같은, 카산드라 같은, 출산드라 같은, 외국어의 후레시를, 밤 깊은 아파트에서, 공원으로다가 비치게 되는 것이다. 철학과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문학과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한국 노래를 듣다가, 숨이 막혀, 산소 중단으로다가, 쓰려져 죽을 때, 그때 갑자기 방에 불을 켜고, 책을 한 권 꺼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과대학생이, 군대도 다녀오고, 내내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집 좋은 아파트, 자기 서재에서, 책이 가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가깝고, 자기 주위에도 같은 사람들이 클론처럼 많다고 해도, 대학생 전부가 그럴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문과대 내에서만 해도, 전공 과목 책과, 취직 공부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휴메니즘이고, 아이들처럼 구는 아이들이다. 그들의 과도한 즐거움을 우리는 결코 비난할 수 없다. 그들은 곧 넷플릭스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디즈니, 웨이브, 일본 야후, 그런 것들이 잡아먹게 되어 있다. 하루하루 그것들끼리 연결되는 것으로, 시간감을 챙긴다. 그러니 그런 휴메니즘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책을 많이 사다 놓아도, 사다코, 우물에서, 책에서, 내가 기어나와서, 나와 조우하지 않으면, 그것도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학교가 있는데, 시험을 봐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 사람들은 그 젊음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책을 산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합격한다는 말이다. 여행을 잘했다는 것은, 여행에 지속적으로 합격했다는 말이다. 좋은 옷과, 좋은 노래와, 좋은 휴메니즘은 그러나 애매하다. 합격의 문을 낮추고, 어느 멋지고 훌륭한 값비싼 키친 인테리어처럼, 좋은 시스템을 갖추었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계속해서 합격하지 않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옷과, 좋은 노래, 그리고 좋은 휴메니즘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수사가 될 때는 그렇게 황홀하다.
어째서 자기 공부도 바쁘고, 취직도 신경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는데, 다른 학생들은 책장도 없다는 것에 아픔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아프리카는.
히말라야는.
*
정확한 숫자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에 대한 자각은 옛날부터 있었고, 최근에는 팔 번 출구 같은, 백룸의 어떤, 그런 것들로써, 그와 같은 자기들의 단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정확한 숫자가 나타날 때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백룸에 숨고 싶은 생각도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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