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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가수가 월등한가? 배우가 월등한가? 그라마톨로지의 본체에 관한 오래된 정원.......

by 마음대로다 2013. 12. 26.

가수가 월등한가? 배우가 월등한가? 그라마톨로지의 본체에 관한 오래된 정원.......

 

 

 

 

 

 

 

 

만일에 사람이 자기 원인도 아닌 급격한 협심을 동반한 신경불안에 휩싸이게 된다면, 우리는 사탄 핏에 빠지겠는가? 아니면, 참고 견디면, 다시 원상복귀가 될 것이다는 미학과 형식을 믿어야 하겠는가? 그와 같은 급격한 이중상태는 보통의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폴리탄들은 경험했고, 자기 몸을 세상 온갖 군대에다 던지는 실험을 감행했었다. 사람들이, 특히 폴리탄들이,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해,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은, 내게 와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행여 나를 그런 사탄 핏에 빠뜨리는 초자연적 컴퓨터를 염려해서일 것이다. 경찰은 경찰답지 못하고, 여자는 사랑스럽지 못하다. 여자에게 사랑스러움이라는 속성을 빼고 나면, 치마 입은 그냥 연약한 남자일 뿐이다. 여자에게는 사랑스러움이 묻혀져 있다. 그것도 폴리탄들이 알고, 우주의 신비라고 보둠고 있다.

 

다음으로 두려운 것이 치매이다. 지식과 기억, 특히 기억이 능력의 차원에서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현상인데, 그것은 대게의 경우, 도덕적인 판단이 남발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섬세해서, 자기를 자기에게 게토로 만드는 일을 많이 하다보면, 정말이지 극적이고, 마치 장난스러운 듯한 기억의 회복과 빠짐을 반복하게 된다. 싫고 좋음이 급격한 조증이라는 것도 비슷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래도 기억의 파이프가 건사한 것이다. 치매에 이르고 나면, 기억 자체가, 거의 엄청난 확률로서는 농구공이 내게 패스된 경우, 그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마는 경우까지 있는 것이다. 자인운트 차이트라고 유명한 이름이 있지 않은가? 철학적 단편은 단 한 가지도 몸에 흡수되지 않는 가운데, 차였다는, 그것은 어쩌면 국공합작일 수 있다, 우리 말로는 헤어졌다, 찢어졌다, 바람 맞았다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일제 시대 이후로, 무성 영화에서부터 차였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이 사회 공중으로 확대된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독일 여자와 한국에 놀러왔다가, 여자에게 차인 것을 차였다고, 어느 종로의 모퉁이를 돌 때 중얼거렸고, 한국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는데, 기브엔 테이크 식으로, 우리는 그것이 시간을 가리키는 독일어가 차이트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 것이다. 염상섭 삼대의 첫장, 경애가 나오는 장면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도 독일어로 차이트가 시간이라는 사실에, 소설가이자 작가로서, 막걸리 술꾼으로서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경애란 말 뜻은, 사랑이란 어린아이의 얼굴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존경을 서로에게 품지 않으면, 다만 실랑이로 끝나는 끝맛이 좋지 않은 불량 엿가락 가튼 것이라는 의미이다. 염상섭은 그런 묵경의 경애를 무던히도 사랑하였다. 묵경은 사랑 뜻을 듬뿍 게시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아름다운 문장만 남긴다. 기억은 사랑을 터부시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을 넘어서야, 사랑이 경애만이 아니다는 것이겠으나, 그것에 실패하면 다만 경애의 단계에 있는 것도 좋은 것이다. 기억을 유지하려면, 생활에 치매에 걸려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면. 폴리탄들은 치매에 관한 많은 개인적인 연구를 거듭하지만, 그것마저도 관념과 박력이 필요하다. 하루하루 끌려가면, 육체가 흐느적거릴 뿐, 대학 교재란 것도 병법의 일반율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본문을 읽어라. 본문을 읽어라. 우리가 잔소리를 하는 것도, 본문에 아무래도 항목을 벗어나면 반드시 채워넣어야 하는 세포들이 천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카시, 폴리탄들의 치매는 자기들이 훌륭한 서적의 저자였다는 사실마저도 요원하게 만든다. 대개의 훌륭한 서적은, 사랑도, 경애도, 도덕적 판단도, 세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결국은 남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보다 훌륭하여,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지기는 하지만, 작가가 시의 뜻이 뭔지를 모르는 시어적 상태는 단지 특정한 것이 아닌 것으로까지 널리 알려진 것이다.

 

 

남이 나를 사탄 핏으로 빠뜨리는 급격한 감각의 침입을 갖는 경우, 그리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치매의 낭떠러지에 내몰릴 경우, 폴리탄들에게 방법은, 마치 그것의 방법이었던 것처럼, 야만 상태에서 단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가수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다른 하나는 배우였다. 패스트 퓨리어스. 우리가 그래서 음악을 사랑하고, 발라드를 세포의 꽃이라고 좋아하고, 나는 가수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기를 자랑인 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마침내 내가 말한 것처럼 끝맛이 시원치 않은 엿가락의 차이트 안에서, 이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의 차원에서인지 그런 것까지 보게 된 것이다. 배우는 더더욱 좋은 것이다. 배우는 생각보다 강력하고, 분명 가락국이나 가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었는데, 입센의 연극이 가난한 계급과 계층의 사람들의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정열, 아버지와의 싸움 같은 것의 표상으로서, 휘닉스의 느낌을 주었다면, 그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태반인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이정재의 급격한 씨에프의 대사처럼, 약간 덜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말하기를, 그래도 얼마나 할 줄 아는 것이 많은데, 하며 크게 웃는 것이 보기 좋은 것이다. 우리들의 학원은 암기 등을 가리키는 곳이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차는 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유도 선수 추성훈이 유도를 좋아한 것은, 그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별 걸 걱정하는 여자였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가수가 아무런 사회적 감각도 갖지 못한 치매에서 가끔 돌아오는 기억력의 소유자요, 그런 기쁨을 노래하는 간헐적 존재의 연속일 때, 그래도 그런 가수 노비적 상태에서 기적처럼 가수가 월등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장자권을 가질 때가 있다. 하지만 배우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그와 같은 차원 융합, 지평, 혹은 정반합의 단계에 이르고 만다. 바흐의 두대의 바이얼린을 위한 협주곡이, 가수와 배우의 하나되는 상태를 데지그네이션한 것이 아니라고 어느 누가 말하겠는가?

 

 

 

그것은 가수가 있잖은가? 배우 같을 때이다. 박목월의 위대한 시.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마지막 반복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반복구가 있어서, 상투적인 시간이 결코,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보다 완벽한 결말을 보이지 않는 구문으로 데지그네이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애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 시는 불완전하다. 처음에 가는 나그네는 박근혜 대통령처럼 수행원까지 거느리는 훌륭한 셀프 마치 같은 느낌이 있는 반면에, 두번째에 가는 나그네는 불완전한 원죄의 자기 원인을 감추고자 걸음을 재촉하는 아낙사고라스 같다. 가수가 배우 같기는 어려운 것일까? 그러니까, 가수가 가수면 되지 라는 뻔뻔한 자인에서 벗어나, 차이트가 난무하는 곳을 조금은 견디고, 빛처럼 뭔가를 계시하면서 패배도 하고 승승장구하는, 음악 영화 같은 것은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시는 경애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사탄 핏으로 사람이 몰릴 결정적인 특수 상황에 아무런 힘이 남염부주지 되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그러니까, 착한 일이나, 일의 하나님적인 능숙함이 아니고, 사람들을 공동체적 치매에 걸리게끔도 한다. 국어 시간이 끝나고, 머리에 창의적인 세포가 내려앉은 사람은, 수업이 도움을 주었기 보다는 제네시스 원래부터 그랬을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