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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이중간첩(2003)의 엄복동의 자전거적 성격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4. 2. 11.

이중간첩(2003)의 엄복동의 자전거적 성격에 관하여

 

 

 

 

 

 

 

 

엔니오의 음악은 영화 음악인가? 아니면 글쑤기 배경 음악인가? 나는 그렇다. 느낌에는 독도의 연구소 같은 곳에서, 느낌에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처럼, 그러나 남자, 흰 색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한쪽 팔에는 상처가 있는. 시적인 나열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퐁네프의 다리. 영화 이중간첩은 그와 같은 농어와 폐어의 독특한 생명체들에게는 레디오에이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산 치하의 인민들이 자유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사람들이 맞이하는 그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실은, 다만 오토바이가 있느냐 하는 구매의 결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꼭 무슨 글을 써주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욕망처럼, 오토바이에 훌륭한 cf가 있느냐, 그렇지 않은가? 도둑 같은 남자가 여자와 함께 수많은 지참금을 요구하는 것 같으면, 여자의 아버지는, 꼭 엔니오를 닮아서도, 남자에게 cf가 있느냐고 그런 최소공배수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cf로 버는 수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영광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는 최소한의 자기 소개 같은. 남자가 직업이 있는 것 같아도, 밀물처럼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남자가 그처럼 광주에서 영광까지 영광스러운 바이크 여행을 할 줄 아는 머시씀건이 있으니, 장동건, 대장건, 김대금, 이호선의 잔잔한 근대사 공부, 콘셔스니스, 백제에 빠진다고 해도 몸매가 날씬할 것이고, 여자가 돈을 벌어 바깥 나들이를 한다고 해도, 최소한 외출하는 것에 만족이 있으니, 삶의 회복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선화공주는 자기 마음 안에 서동왕자를 앉히고, 무조건적으로 남편을 서동왕자라고 하면서, 지는 해를 보는 할머니로서의 항거의 레시스탕스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선화공주는 있다. 그것은 남자가, 한석규와 거의 일치한다는 고통. 그리고 아는 것이 많아서, 이데올로기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그런 삶의 생리적인 생리통이 조금도 없다는 전언. 선화공주는 하향지원하는데, 영화와 현실이 일치하면 무슨 남자가 서동일 수 있겠는가? 이데올로기 문제로 자승자박하는 일이 일절 없으니, 국정원의 개입은 백주 대낮에 토털에클립스의 문제나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레디오에이션이 이중간첩이 그나마 내게서, 소치 기념일날, 보게끔도 하는 서열 막바지의 작품은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게서는 멀다 해도, 소치가 터키나 이스탄불 그리스에서는 가깝듯이,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가까웠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멋질 수 있는 것일까? 남자는 직업이라는 국정원을 갖고, 글을 조금만 잘 써도, 선화공주는 거북선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 그것의 아름다운 처마를 하나님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침범하시지 않는 분이지만서도. 우리가 영화에서 위아래로 길게 스크레치가 난 것이 비가 온다고 했지 않은가? 나도 그렇다. 담배 피우고. 동시개봉관 같은 데에서, 옛날의 홍콩 영화만, 조금 익힌 것으로, 보고 지낸다면, 나이만 조금씩 드는 나의 삶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삶은 촉수에 있다. 성기는 촉수의 하나이다. 그것의 독재가 된다면, 그것은 슬픈 임나일본설이다. 이중간첩은 그것의 하나 같은 촉수를 닮은 데가 있다. 개인의 역사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는 것도, 영화처럼 영화롭지가 않다. 아버지는 멋진 말을 하지 않으며, 그것의 우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늘 즐거운 말을 하고는 다른 데를 쳐다본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영화의 배경 음악이다. 그러나 글쑤기의 배경 음악이 된다는 것에 남북한은 공히 긴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배우가 영화롭지 않는 것이 그래서 방정식화가 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평범한 가족이 아들 중에 한 명이 글을 쑤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엔니오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두고 젓과 꿀이 흐른다고 해도 될런지...... 가까운 곳에 늘 항구가 있고, 광주에 있어도, 사람들은 저 멀리 있는 부산과도 함께 생각한다. 해운대로 넘어가는 언덕이 있지 않은가? 뭔 다 내 공원인가 싶었다. 차가 막혀서 천천히 데이스타를 당기고 있었는데, 칼국수 집에서도 한효주를 닮은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헬멧을 쓰고 있었으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러니 나는 이중간첩을 다만 한석규의 마땅치 않는 부분과 더불어, 제목이 마땅치 않아 보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특별한 부위는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영화로도 했을 것 같은 느낌이, 오늘 영화를 스킵하면서 보는데 들고 있었다. 그것은 팔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케이나인 당신께 오마쥬처럼도 인디펜던트 센텐스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그러니까 그런 가젯들의 집합소. 사물이 뭔가? 그것은 물질이 아닌가?  소치는, 내 편 드는 것 같은 착시의 양심과 지성소 안에서, 나의 피난처로 약정이 된 것도 같다. 보통의 프로타고니스트가 페넬로페로 돌아가는 길에서, 피살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태양의 눈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한석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고소영이 대단히 예쁜 것도 아니다. 국정원은 다 내 명령권 아래에 있지만, 도저히 접선이 되지 않을 때는 차라리 북한 지도부에서 거둬가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의 흙을 먹는 시문학적 결합. 자연신학적 트리니티. 지속적인 장애와, 나의 괴롭힘과, 나의 생활세계적인 울부짖음이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렇게 색깔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차갑게 그것을 데지그네이션하고 있다. 슬픔은, 도덕에 있지 않다는 것. 도덕에 있지만, 일차원적이지 않다는 모호성. 안동도호부.......

 

 

어차피 그런 식의 유적판단은 동양의 유자들을 눈뜨게 하는 만나가 되는 것이니까.......

 

 

 

 

그래도 내가, 너무나, 평온한 학생처럼 보인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여자의 섹스리스는 불임과 열매 없음의 심볼 같지만, 남자의 섹스리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