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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월간조선과 신동아는 누구를 인터뷰했던 것일까?

by 마음대로다 2012. 8. 2.

월간조선과 신동아는 누구를 인터뷰했던 것일까?

 

 

 

 

 

 

 

 

옛날에 어느 재벌 그룹에서 사카린을 밀무역했다가 적발되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을 강요하면, 생각할 수는 있다. 총각이 배움에 뜻을 두고, 총각김치. 처녀가 은근한 믿음과 교회 출석과 믿음과 처녀의 최고 가치를 유지하는, 아니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듯한, 소양강 처녀. 서울은 그것의 질량이 총각김치와 소양강 처녀 이상은 발생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가 낫다는 것이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가 낫겠는가? 프렌즈가 낫겠는가? 존만한 토마스 룬트가 낫겠는가?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그 놈의 새끼가 한국 사람이었다고 미는 태공조를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믿겠는가? 사태가 좋아지면, 다시 나를 괴롭히고자 할 것이다. 총각김치는 눈이 없다. 소양강 처녀는 모든 처녀의 운명이다. 은장도는 뭐 같다. 에어컨이 필요가 없는 것이, 그런 태국 영화들은 단 하나의 관념만 있어도 선선하다는 감각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총각김치는 매운 냄새와, 맛있는 냄새가 관념이다. 소양강 처녀는 아지랑이가 오르는 것이 관념이다. 좋은 옷을 입혀주고, 토마스 룬트 같은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것이 그들의 기독교 신앙이 된다. 물리학이 무엇인가? 힘은 질량과 마찰의 방정식이라는 것이 아닌가? 헤겔이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마찰은 성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관념과 가치의 늘리티이다. 질량이 다만 공권력의 AV 낚시꾼 같은 일드 기관장으로 나아가고, 마찰이란 것은 남의 괴로운 모나드에 의지하는 것이면, 사람들이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달팽이가 된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자기 마찰로서의, 양심이나, 양심 그 이전의 자극과 반응으로서의 인간적인 커트라인, 그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완전 달팽이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포유류는 인간에 가깝다. 맹수는 무조건 잡아먹는 것들이고, 맹수일지라도 따뜻하게 해주면, 따뜻하다면서 보다 넓은 자기의 모습을 의탁하고자 한다. 판단이 개입하면, 달팽이가 생긴다. 달팽이 집이 있는 것들이 있고, 그것은 그나마 시니피에가 있다는 소리인데, 없는 것들이 기다랗게 기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달팽이인가? 그것은 이전성. 포유류는 인간이 되는 단군 신화가 있으니까. 조류는 하늘을 나는 신화가 있으니까. 그래서 조두순이라는 이름은 내 생각에는, 희망사항이 아닌가 한다. 그것 말고는 될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대입해보아도, 조류와 포유류가 아니면, 인간이 되었다 해도 반드시 지사츠를 지속적으로 결행할 것이다. 그래서 폭력 달팽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대는 들어는 봤나? 폭력 달팽이? 어쩌면 오리엔탈 특급이라던지, 아메리칸 엑스프레스가 그것의 암호가 아니었나 한다. 우리도 있었지 않은가? 이태준이 무서록에선가? 만주를 달리는 자기가 타고 있는 기차가, 어둠 속을 뱀이 되어 지나가는 것 같다고. 이태준은 슬픈 유림이다. 보편에의 능력이 하나도 없이, 다만 천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곳을 유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양 철학을 아는 것도 없고, 동양학에 조예가 있는 것도 없다. 민중보다, 다만 풀꽃만큼 예쁘고, 키가 크며, 지면에의 조형력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인간이 도저히 아니다. 단 하나의 좋은 모나드도 약속할 수 없는, 그와 같은 무차별적인 대자대비. 어쩌면 집에 달팽이들을 많이 키웠을 것이다. 가끔 잡아먹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