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중국의 면산이 유행하고 있다.
우연히 면산을 보았다. 떠오르는 것은 몇 가지. 그것의 맛있는 반찬을 우리는 지울 수가 없다. 대지는 척박했고, 박정, 요리 전의 생가지는 삶의 쓰린..... 어떤 명사가 붙겠는가...... 생?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바로 먹으면, 그것이 그렇게도 유치하다, 그것이 아니라, 세련되지 못하다, 척박하다, 그 말은 이미 했고 정확하지도 않다, 투박하다. 아. 투박. 투박함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투리도 대충 쓰고, 한자도 잘 모르고, 마땅한 도시 여행에 대한 계획이나 비전이 없이, 저작?거리나 두리번거리는. 몽고 여행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일본에게 몽고겠는가? 홍콩에게 몽고겠는가? 북경에게 몽고겠는가? 몽고간장. 몽고메리. 내몽고자치구....... 몽고 고통스럽게도, 광주에서 몽고를 꿈꾸는 것이다. 계몽주의라 함은, 광주에서 선비로 태어나, 한자를 익히고, 멋진 말을 타고자 함인 것이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다. 코란에 하나님에게 딸이 있다는 센텐스처럼. 중국의 면산은 그것을 가로질러 있다. 먼산 언저리마다, 한국 노래가 있듯이, 선행주자가 다녀왔다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듯이, 후발주자가 되어 다녀온다면, 그 자리에서 한 다섯 번은 반복할 것 같은 말이, 면산 언저리마다..... 우리는 음악이 없다. 옆에서 틀어주거나, 관광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리 토속적이고 민중적이기로서니 바이얼린 협주곡보다 근사하고 아름다운 것이, 우리의 달팽이관은 기본적으로 음악이 없음의 이명상태를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연타발. 사극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국정은 멀리하고, 여자 악사에게 음악을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아주 점심부터 저녁까지 용상에 앉아 연타발로 음악만 듣는 것이 직업이 아닌 것으로서의 황제의 속성이 아닐까 한다. 따라 떠오르는 것은, 산서성이라는 것. 나는 산동성은 알아도 산서성은 몰랐다. 그 서쪽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성인가? 남녀가 서로 싸우고, 우리 헤어져, 해놓고, 저작?거리의 다다음집에 여자가 산다고 하면, 대체 얼마나 헤어진 것인가? 산동성은 바다를 연해 있어서, 독립적이고, 독도 같으나, 우리식으로 말하면, 산서성은 산동성을 기준으로 해서, 그나마 바로 동쪽에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그 넓은 대지 위에 뿌려진 웃음의 페이소스가 도리어 슬프게도 반향이 되는 것이다.
점심으로 고시원 깊은 곳에서 신라면을 끓여먹었는데, 오늘 따라 국물이 유난히 맛이 있어서, 가난한 중국 인민이 한국 라면을 사랑하듯이 국물까지 먹을 기세를 가져보았다. 그런 특별한 사람이 있을까? 자기가 먼저 하나 끓여 먹고, 국물을 다 마시고, 지나가는 아이에게 끓여서 면을 건져준 뒤에 국물을 다 마시고,
이 국물은 마치 천국 같은.......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마르칸트. 중국이나 네팔 여행 중에, 처음으로 신라면을 끓여주는데, 매워서 콧물이 나오고, 그래도 첫인상은 괜찮았다는 느낌. 두번째로 먹는데, 매운 음식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마치 존윌리엄즈의 쉰들러스 리스트의 메인 테마 같은 것이다. 영화라 함은 등장인물인가? 아니면, 개가 뼈를 하나 물고는 자기가 비친 물을 바라보면서, 黑, 아돈워너투비콘티뉴드........
몇 가지가 있어도, 요리를 해먹으면, 그 옛날, 가지만한 것이 없었다. 달콤하고, 값이 싸고, 무안 양파하고........
우리는 아직까지,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태국의 세트장처럼 상상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를 대학에 가서 알았다. 만일 고등학교 때에 어렴풋이 알았고, 대학 때에 헤겔에 대한 관심처럼 읽었다면 모를까? 나는 철학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얼마나 황제 같은 것인가? 직업이 없는, 지혼자 바쁜 국정 같은 것인가?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내가 쓸만 한 것이, 이것도 아니다 했다. 그러던 중에 하이데거를 알게 되었는데, 면산 언저리마다, 정말이지 나와 꼭 같은 문장과, 보폭과, 비철학적 호흡의 유입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의 실재가 그랬다. 수학은 기본적으로 못하고, 배 고프고, 돈 없는 중에도, 밥맛이 늘 좋았다. 붉은 산이나 학마을 사람들처럼, 분명히 나의 삶과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리얼리즘이 강건했다. 산이 붉은 것은 유입이 되었다. 바람이 부는 날 누군가 찾아오는 것도 유입이 되었다. 그러나 캐릭터는 지나가는 다른 버스들과 같았다. 아픔은 유입이 되었다. 아름다운 작품의 정서는 훌륭한 높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것이 불안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방법론적인 불가지론 같은...... 지금은 물러났지만, 하이데거는 참으로 훌륭한 본보기였다. 헤겔이 산동성의 위대한 고전주의면, 하이데거는 마치 산서성 같았다. 우리는 자문할 수 있다. 개념이 우선인가? 절편이 우선인가? 개념은 보편적으로 나아갈 수 있고, 절편은 음란하고 특수하다 할 수 있다. 개념이 다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자와 하고 싶다고, 냄새가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어느 정도 개념으로 걸러진 다음에, 기질을 내비치는 것이다. 개념이 허술하면, 중국의 수많은 지록위마 고사 비슷한 독재자들의 숲이나 이루게 되어 있다. 사람은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교적 잘 드시고, 여자를 잘 만나셨던 것 같다. 그것은 그래서, 구체적인 사람이기보다는, 시니피에....... 수가성의 과부에게도 나타나신 것처럼....... 절편은 시니피에가 그나마 사람이라는 해시계 비슷한 것으로서의 증거이다. 스피노자는 안경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사과나무가. 실제로 그의 에티카를 읽어보면, 멋쟁이 안경 쓰고, 사과나무 과수원을 말을 타고 지나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헤겔의 것처럼 읽혀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필연이다. 연필연........ 하이데거는 버티는 것 같다. 그것은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책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칸트는 다만 헤겔 이전이라는 말이고, 이전이라는 말이 다만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긴밀함이라면 먼저 시간성에 우위의 가능성이 있음을 점치는 것이다. 헤겔은 미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전반적인 규모와 의지는 헤겔의 것을 거의 그대로 닮아 있다. 그래서 그의 절편은 매우 깊은 것이다. 나머지의 여백이 헤겔을 찬양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애가 어찌,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아름다운 항목들이 응집된 문단들을 여기서 혹은 저기서 맛보게 되면, 하이데거는 다만 보성 녹차 한 잔이 되어 있는 것이다..........
면산은 보다 깊어 간다. 저녁은.
삼국사기가 석가탑이 되고, 헤겔이 다보탑이 되는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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