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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역사적인 영문학적 한일전, 형태주의적 한판. 일본 애니 아키라의 마지막 대사, 코너링구다요 코너링......

by 마음대로다 2012. 8. 11.

역사적인 영문학적 한일전, 형태주의적 한판. 일본 애니 아키라의 마지막 대사, 코너링구다요 코너링......

 

 

 

 

 

 

 

 

마음이 닫히면, 머리는 생각할 것이 없고, 마음은 바라볼 것이 없으며, 다리는 갈 곳이 없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닫힌다. 그것은 세계사적인 개인이 아니어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유명한 대사. 나만 아니면 돼. 그것은 행동주의적인 의미로서는 제법 기능적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것에 대입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저 멀리에 떨어진 나무의 산소의 덕을 입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듯이, 그래서 독일 노래 중에 타넨바움, 한국에서 탬플 스테이할 때, 실수로 타진 밥을 먹어도 그렇게 기와 리가 차고 넘쳤다는, 소나무가 그렇게 영험한 것인 것이다. 점점 내가 먹고 있는 음식들이 세계적인 문화 현상들에 비해서 더 맛이 있다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빵은 우월했고, 빵과 우유는 남녀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황경선.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코란은 마음이 닫힌 사람, 발성과 기도 모임의 기분에서도 닫힌 바의 사람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으니, 짧게나마 여행하라고 가르친다. 내가 자주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곳을 내가 다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는. 하물며 전라도는. 내 씨비육백에프는 무겁게 주차되어 있다. 내가 만일 중국의 한 성에서 살다가, 다른 성으로 여행할 것을 계획한 것이면, 마음이 닫힌 것이 시각적인 의미로써 증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장성은 나무 숲이 유명한 도시로. 담양은 대나무가 보다 풍성하게 가꿔진 곳으로. 메타쉐콰이아도 그렇고. 화순은 왠지 모르게 놀이동산이 있는 곳으로. 나주는 아주 깊이가 있는 유학의 대학교가 있는 곳으로. 무안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는 몽탄 저수지로. 일로 품바.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축제가 있는 곳으로. 목포는 거대하고 촉촉한 아름다운 항구로. 줄여서 미항. 드문드문 에피퍼니는 아름답다. 그러나 뜨거운 대지는, 인문학적인 자기 회전이 없는 투피엠들은 성급하고, 자장면을 일주일 내내 점심으로 먹는 듯한 한계상황을 가리킨다.

 

무의식은 기차와 같다. 아름다운 오토바이는 반쯤 여자와 같다. 줄여서 반려자......

 

한 폭의 그림이라는 것. 한 포기의 배추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이념을 바라보는 불만들이 아닌가? 생활을 사는데 무슨 이념인가 할 것이지만. 그 옛날 우리 선수들이 잘 먹지 못해서 후반전에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서양 사람들이 키가 크고 날씬할 때, 우리나 일본은 일본의 오사까 간바레에서 뛰었던 선수처럼, 무조건 열심히만 뛰는, 한국 선수들도 닌자의 보폭을 갖고 있었지 않은가? 우리가 일본을 이길 때는, 다만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정의가 덧붙여져서 기뻤던 것이지, 순전히 보이는 것으로만 따지면 잘 살아도 이상하게 키가 작고, 매우 성실한데 우리 동양인처럼 클래식적인 골 결정력이 부족한 선수들이 늘 지는 것이 그렇게 막 기쁘거나, 북치고 장구치면서 좋아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잘 먹어도 그렇게 작고, 우리는 잘 먹지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아주 조금은 키가 일본 보다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우리의 불만은, 내 개인적 금고 안에 담겨진, 옛날 우리 스포츠 선수들의 사진과 반드시 결합된다. 동서양이 키도 엇비슷하고, 공을 다루는데 불편할 만큼 하지장이 짧지도 않다. 신문 기사에도 이제는 멘탈이다 하는 표현들을 자주 접한다. 일본이 지면, 이제는, 우리도 잘 못하는 클래식에서 지는 모습들을 대신 보는 듯 하다. 학생 운동의 형이상학은 반드시 유토피아론으로 나아가며, 그것은 지금은 잊었지만 유토피안 맑시즘인, 지금 생각났는데 에른스트 블로흐의 것과 매치가 된다. 우리가 그만한 솔직함이 없어서 탈인 것이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스탈린의 공산주의 일국 달성론의 논쟁으로 자기의 형이상학을, 다시 말해서 시니피에적인 영혼을 넘기고 마는 것이다. 것도 아니되니까, 북한 우월주의적 색안경적인 모든 설명 가능성으로 경도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 시인들을 반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은, 그들의 시가 좌우충분한 유토피아가 있고 분명하나, 우리 삶에 대입하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이다. 대신에 대낮에 막걸리 같은, 일년의 반 이상을 포상휴가로 보내는 딴나라 군대 같은 소설의 부피가 있을 뿐이었다. (영화의 기능은 그런 면에서 지대하다.) 이론 가능성은 매우 요긴한 것이다. 설명 가능성이란 이론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설명 가능성에 미진했던 것은, 남의 이론을 가능성으로 들여와, 주체를 착각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여와서도, 설명 가능성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대학 여성들의 임무일 것이다. 결국. 동양의 고전은 그 풍족한 사상들을 충분히 내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문명 아래서 개인들이 해석학적 함량 미달들로 인해서, 풍족하게 자라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의 아름다운 호수가 아주 돌을 뚫는 듯한 선을 통해서만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있는 지도 몰랐다. 탓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터치. 다만 설명 가능성만으로도, 고종은 이준 등을 헤이그 특사로 보내지 않을 수 있다. 이번의 런던 올림픽처럼, 설명 가능성의 힘만으로도 그것이 저마다의 아키라가 되어서, 일본 애니 중에서 가장 어려운 아키라의 끝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영문학이 처음에, 우리의 바쁘고, 좁고, 사는 곳을 좁게 만들어서, 세계 해석 능력이 미진한 곳에 떨어질 때는, 그들의 종합적인 제국주의 팽창과 오버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설명 가능성을 서로 충만하게 하고, 짧은 말이든, 정확한 말이든, 저마다 좁은 영혼의 텃밭이지만 행동주의적 이념주의자가 되어서, 영어로 엑티비스틱 아이디얼리스트,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영문학은 우리가 일본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듯이, 풀타임, 영국도 조금 더 잘 살고 생각이 볼만하게 복잡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는 스타워즈처럼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딘가에 있다. 그것의 중력은 어디에도 있다.

 

일본 애니 아키라는, 슬픔이 장대하다. 군대 아니면 학교의 범주 밖에 없는 대츠오에게, 카네다는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가르친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드문 것이다. 군대 아니면 학교 밖에 없는 일본 청년들에게, 그것의 종합적인 투사는 당연 오토바이는 폭주족인 것이다. 자동차들의 공장에서부터의 차양막은 그것의 달라붙은 시니피에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 않는가?

 

 

 

 

 

다만 말 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