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장에 가본 적이 단 삼일 정도이다. 가본 적이 없다는 것과 홍콩 영화의 길항관계......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문제는 어째서 드넓은 사계절 중에서, 뜨거운, 맹목적인, 관리인 감독관의 세상이 넘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장르는 살아있는 것과 같다. 장르는 분명 살아있다. 친구가 오랜 만에 전화를 해서 듣게 되는 말 중에 확률이 높은 것이다. 너 이 자식. 살아있었냐? 왜냐하면 군대를 갖다왔다는 것이고, 죽을 고비를 거기서 몇 번 넘겼다는 것이고, 문장은 저장된 뒤에, 마치 전쟁 영화의 전우간의 대화가 가능할 법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설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로 친구가 죽을 수도 있었고, 그 친구의 죽음이 내게 좀비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마치 고대 중국 신화에서의 순을 대하는 상의 태도처럼, 위치이동이 되는 것이 있음이 우리의 죄악된 뇌하수체에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 둘 곳이 없으면, 차라리 내가 합기도장을 삼일 정도 간 적이 있다 말하는 것이 낫겠는가? 덥다는 것은 무엇이고, 선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인가? 아니면 감각인가? 도장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나는 태공조에 따르면, 도장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대신에 여자들의 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남자가 되는 길을 걸은 것 같다. 너무 말이 꼬였지만, 머리까지 함께 돌면서 다 들으려는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계속해서 이어간다. 손님이 이어가는 것. 그것은 소박한 유리왕들의 희망이 아닌가? 일주일에 한번씩 머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등급이 하나님이 아닐까 한다. 내가 무엇이던지 말을 이어간다. 그것은 영계로가 아니라, 퇴계로. 어느새 육체의 그림자가, 그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는 더위를 기억하지 못했다. 더울 때는 육이오, 보다 더울 때는 광복절이 있었다. 절대적인 적과, 우리들의 방심과, 늘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 만년 적대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향학열. 그것은 매운 고추를 여름에 먹고는, 혀를 수십번 수백번을 불고, 그렇다면 우리 안의 산소 농도가 얼마나 강제되었겠는가?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농촌 운동을 하던 사람도, 강제로 공급된 산소 때문에, 의기를 잃지 않고, 뇌물을 받고 좁은 방에다 이런저런 보물을 가져다 놓을 찰라에, 맵다는 신호와 그에 대한 반응 사이로, 고통은 한 순간, 보다 차분하게 인문학적 풍경을,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을 풍경을, 관조하게 하는 시간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한다. 매운 것이 단 것과 어떻게 그래프 상으로 닿아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을 잘 알았다면, 지금 사람들도 매운 것을 잘 먹을 것이나, 선배들도 잘 모르고 엉겹결에 그래놔서 후배들을 가르치지 못한 것일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산소가 많이 들어온다. 공기를 많이 부딪힌다고 해서 산소가 그만큼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공기의 오케스트라 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누군가의 말처럼 마냥 사무실 같은 자동차 실내와는 뭔가가 확실히 다르다. 엔진음이 알피엠이 적당한 클러치를 찾을 경우,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 시간에 들어가는 것 같고, 공부가 매우 재밌게 여겨졌던 믿기지 않는 시간을 걷는 것 같으며, 바로 그와 같은 때에 학교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 같다. 나는 고알피엠을 쓰지 않는다. 다른 것이 매울 때의 고통이 살아나기 때문일까? 내가 못가진 것도 없고, 내가 못한 공부도 없으며, 내가 못한 것도 없는데, 다른 매울 때의 고통이 무엇이 있길래, 내 씨비육백에프가 삼천알피엠과 사천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 그냥 클러치를 옮기는 것일까? 데이스타는 보다 정확하다. 삼단은 쓸 데가 없고, 사단은 공부는 잘하나 세상에 보탬이 안되는 사람들 같고, 오단이 되어야 모든 단체의 청년 회장처럼 말도 잘하고, 교양도 있고, 여자들끼리 부딪히는 바닷가를 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단만 오단만 간다고 그런 사람은 되는 것은 아니나, 옛날의 홍콩 무협은 데이스타의 오단 중에 오단이요, 참 오단 같았다. 그때는 데이스타가 미라쥬 육백오십이나, 심지어는 할리로 변신하는 느낌이다. 배가 아프지 않고, 속도도 마음에 들며, 소리도 차분하다. 문제는 높임에 있다. 그것은 막연한 명사이다. 높임이 높게 한다는 동사형의 명사인지, 아니면 높임말의 의지나 의미를 가리키는 것인지, 상대에 대한 우주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내가 지금 쓰고도 바로 이것이다 가리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높임이 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공사다망에 스며든다. 우리가 짓궂게 장난 말을 쓴다고 해도, 그 사람이 교양이 있거나, 차분하거나, 서로 사고가 났다 해도 거의 전부를 자기 재산의 털만큼의 양처럼 처리하거나, 먹을 것을 가볍게 먹으러 가자거나, 하는 사람이라면, 여자는 남자의 그런 말에 화를 내는 대신에, 자기를 뭔가 짓궂게 사랑하는 것인가 착각하는 사과에 들어가는 것이다. 구김살이 없다는 말도 있다. 구김살이 없는 채로 반말만 일삼는 경우는, 한국 사람들인 경우 상상할 수가 없다. 도리어 높임말만 쓰는 타입인데도, 일반인들 눈에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그런 사람인 것이다. 자존심이 거칠게 강하면, 높임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자존심이 없는 채로, 높임말만 쓰는 사람인 경우에는, 허리부터 구부정할 때가 많다. 우리의 과거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지형 속에서 독특하게 가난했던 우리들의 모습은, 실제로는 거칠게 자존심이 강했거나, 허리부터 구부정한 사람의 두 패로 나뉘었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만화에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관념의 사회적 규율에 가까운 소설이나 평론에서는 이미 실제 삶의 유리창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했던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그것의 비극적인 아스카 문명의 한대목일 것이다. 읽을 수가 없는 것이, 내가 살아오지 않는 삶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만화는 기적처럼, 민초들의 자존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숱한 거짓말이다. 다만 태공조가 바빠서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고 있는 것 뿐이다.
그것에 오메가 쓰리가 있다. 천변만화처럼, 사군자와도 기적처럼 닿는다. 영화 구타유발자에서도, 것도 보다 말았는데, 황조롱인가 하는 새가 아름다운 절벽의 강 아래로 고꾸라지는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징은 자존심이다. 사나운 남정네들도 자존심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가로막지만은 않는다. 인간은 남자들끼리도 투사가 가능하며, 민주의 도시 아테네는 그렇게 솔론 원래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군자부터가 이미 폐색이 아닌가? 사람들은 백미터를 십일초로 달려와 나의 멱살을 잡을 것이나, 나는 그와 같은 주장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허균처럼 능지를 당해도 그러할 것이다. 사군자부터 폐색이다. 아무개의 작가가 말 그림을 그렇게도 잘 그렸는데, 그것의 마사회나, 그랑프리 한국 영화가 유일하게 폐색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날개의 그림자 아래를 하나의 기상처럼 달리던 김태희는, 제주도에서, 내가 기억하기로는, 예술론의 모든 허무함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런 위악적인 그림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의 역사 이래로. 맑스주의가 모든 인간의 역사는 지배자의 관념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 공산당은 그렇지 않겠다는 시니피에가 아니었는가? 그것이 점점 지워지고 사라지는 무렵에,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팔구십년 대의 홍콩 무협 영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씨비육백에프로 포항에서 대구로 가는 길의 언덕을 맨 처음 오를 때,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은 기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기상을 행하오니, 다른 납득자의 삶 다섯 정도는 무조건적으로다 높임 받게 하옵소서라고......
사군자는, 주여, 주님은 깊은 어둠입니다 하는 먹칠과 같다. 마디마디 드러내고, 뾰족하게 하면, 대나무요, 갈 곳 없는 사랑의 감정은 매화이다. 말 할 때마다 방향이 다른 것은 난이요, 사람을 제야에 놔두고, 서울 사람들만 영원토록 챙기는 것이 국화이다. 그것은 분명 어떼이스트 같은 것이다. 바깥에 눈이 내리고, 거대한 어둠이 보인다면, 무등산에서 화순을 바라보는 경계에서처럼, 어떠한 스토리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우리는 아무런 갈 곳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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