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적인 의타기에서조차 떨어지는 매우 심각한 고아들
내 친구 벅스가 조르디 사발을 밀었다. 그것은 나의 한가함과 매치가 된다. 사람들의 신성은 매우 심각한 반복어인 복음서의 이를 간다는 표현과 닿아 있다. 성 밖으로 내쫓겨 이를 갈 것이다. 뭐 그런 표현. 우리는 성경을 교회에서 획득하고, 그것은 참으로 만장 같은 것, 그것이 세상에서는 무엇인지를 모른다. 파스칼을 떠올리는 것은, 그것은 제법 어퍼머티브 총선 같은 것이다. 괜히 카메라 앞에서 악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과, 생각과 쾌락은 조선 임금의 것인,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폴리탄들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는 프랑스 에세이를 읽었다. 까뮈를 읽었다기 보다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었고, 파스칼의 팡세를 읽었으며, 그의 영혼은 나에게 의지되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배드민턴 선수 두 명을 보면서, 미녀대회라고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조형적일지 모르나, 러시아 선수들은 치마까지 입고 나왔다. 그것은 성층권의 공기까지 엔진의 불꽃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민족은, 한 것이 하나도 없이, 다만 버티다가 세계 제일이 된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사찰과 같다. 학교를 빼놓는 것은, 학교는 한국이며, 그 자체, 지금의 세계가 직업 학교를 제외하고는 단 일초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을 담아서 교회에 출석하고, 사찰에 나아가라 하지 않아도, 그것의 선배, 옆 사람, 자기가 학생 때부터 담아온 상치 않고 상하지 않는 과일 냉장고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복숭아로서 나아가고, 어느 날은 사과로서 나아가며, 어느 날은 사과 향기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서글픔이 있긴 하다. 단성생식이라는 것. 그러나 승리는 직업 학교가 없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직업도 없이, 어쩌면 고급 직업, 지금 내내 이를 갈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그와 같은 반복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쾡이의 새끼처럼 놀랐다. 내 친구가 서울에서 옅은 친구로 있을 때, 지금도 살아 있지만, 전화를 하면 받지 않는 남들은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 있으니까,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연대 무슨 과에 다닐 때였는데, 정외과였나? 자기 후배가 철학을 하려면 무엇부터 읽어야 하느냐고 했다 한다. 자기 선배에게 했던 말을 내게 했다는 매우 복잡한 포장의 작업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그대로 들었고, 선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부터 읽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했다 한다. 나는 그때 클러치 조작 미숙으로 대로 한 복판에서 오토바이가 멈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나의 철학 다음으로 어떻게 진행이, 처음과, 나중이 이뤄지는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나는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보면, 나는 내가 골라서, 내가 읽고, 내가 흥분했으며, 내가 노을을 보았고, 친구와 교회 시간이 아닌 시간에 만나, 우리 가난한 광주의 주택가, 배드민턴을 쳤던 것이다. 친구의 영혼은 놀랐을 것이다. 성경 다음의 우주를 걷고 있는 내가 보였지 않았겠는가? 내가 좋아했고, 나의 말상대가 될 것으로 보였던 친구의 누나는, 평범한 노동자 밍맹몽과 나중에는 결혼했다. 그것의 배드민턴. 음악과 함께, 몽따주 기법이라고 하기에는, 모바일한 것으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방법서설로 철학적 시작을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 있음이다. 분명. 일반인들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모르는구나......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플라톤의 대화록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자유에서의 도피를 읽었다. 둘 모두 화끈한 철학책 같았다. 하나는 정신 나간 그리스 부호 세 명이 모노가미는 모른 척 할 터이니, 자기 가장 예쁜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오리엔탈리즘을 내게 제공하는 듯 했고, 프랑크프루트학파는 아우토반을 내가 일정 시간 일정 공간을 세내어 질릴 때까지 달리는 기분이었다. 방법서설은 뱀에게 물리고, 얼른 보건소에 가서 치료를 받고, 친구의 피리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반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반대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고, 코스모폴리탄과 같은 소유냐 존재냐 혹은 사랑의 기술을 읽고,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없는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읽고 난 뒤에 헤겔이나 맑스의 비판적 수용의 길을 걷는 것이,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로마서를 모르는가 하는 것과, 다른 놀라는 점은 교과서의 반복적인 독서와 정격화된 문장들의 신화화에 물림이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학교와 도서관, 독서실, 그것의 불빛 아래서, 겨우 빛이 있으라 좌에서 우로, 질서와 도덕의 협성신학대학교. 대학에 와서, 그것도 마치 떠밀려진 것처럼, 선배들이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니까 자기가 동조하는 것처럼 반응하다가, 졸업과 취직 시험에 임박해서는 단번에 그 좁은 독서실의 형상이 이기주의적으로 입혀지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성찰은 매우 심각한 서적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밥과 김치, 참기름과 고추장, 오이, 콩나물, 계란 프라이, 등으로 박박 비벼먹는 것에 비하면, 먹기엔 비싸고,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우리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백이십오씨씨로 매섭게 전국여행을 다녀온 라이더가 이종소형을 따기 위해서 학원에서 한 삼일 연습하는 것과도 같다. 문법과 정격은 중요한 것이다. 그것에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강사가 타락기사처럼 사나우면 기분이 잡치는 것이기도 하다. 무한하게 가난한 주체의 안구에 집어넣는 개폼이라는 것은 그것의 의지와 쏘세지 같은 질료가 무시무시한 것이다.
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뱀을 보았고, 낙원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적이 있는 것일까? 고대 노예들처럼, 채찍이 무서워, 게토와 콘테이너, 스팀과 에어컨 등으로 야간비행하는 것은 아닌가? 야간 달빛에 보면, 비닐하우스와 강의 빛깔이 비슷해 보인다 한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양가감정이라고 불렀다. 엠비벨런스. 어디에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책은 전집을 갖고 있고, 대충 서로 엇비슷하다. 그것의 단어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세상이 원래 좁고, 그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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