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름들과 위기시의 것을 염려한 것으로서의 오토바이에 관한 전설의 그룹 아바적인 명상
사람의 관념은 성리학에 들어서지 못하고, 숱한 파괴와 괴파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나는 데이스타를 타고, 싱그러운 배춧잎이 핼멧으로 날아와 부딪히는 집근처 한바퀴 투어를 떠날 때마다, 만족하였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만족은 파괴되지 않은 채로, 근처에 있는 온천 유원지의 입구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직선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남면이라는 아름다운 그림 마을을 지나치게 되고, 이런저런 많은 식당들을 만나게 되며, 매우 아름다운, 그래서 내가 아름답구나 그대 유둔재 터널이여 하는 터널을 지나게 되고, 그것의 선은 너무나 세련되어서, 모든 전원생활적인 낭만을 파괴하는 듯도 한다. 그러나 잠깐, 아주 잠깐 제한된 곳에서 그러할 뿐, 다시 차분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차갑고, 무등산의 뒷자락이기 때문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단풍나무 숲길을 지나다가, 화순 적벽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나는 조형물이, 티라노, 서로 마주보면서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사람들의 자유로 놓았다. 내가 티라노를 재미삼아 그릴 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재미삼아 그렇게 해놓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은 선비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이 된다. 오늘은. 성리학에 입회하지 못한 지식인은, 도시 안에서, 정해진 블록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정한 티라노가 되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서양의 정신은, 문헌은, 고전은 모두 성리학에 훌륭하게 입회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순서를 정하면, 성리학에 입회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고, 서적들을 두루두루 읽는 것이 다음인데, 그만 성리학에 입회한 아름다운 여래장의 처음을 어쩔 수 없이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어렵게 공부했던 시절은 고려에 넣지 않고, 지금 착하느냐 마느냐만 갖고 타박한다면, 딱히 안착하다고 해서 사회를 혹세무민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열을 올리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티라노 조형물을 세워두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도시의 블록 안에서, 서로 어떻게 쿼럴 위드하는지 말이다. 다만 귀엽게 스쿼럴하는 것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지만, 세워두니 보게 되는데, 티라노처럼 서로 싸운다고 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언제나 한없는 미궁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몇 가지 계속해서 수상한 삶의 항목들이 있다. 대학들이 세계 곳곳에 빽빽하면서, 유학을 떠나는 에이도스가 없이 집이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찌방이다. 여기서 집이란 집을 가리키기도 하고, 내일 삶의 연장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미국이나 유럽에 철학과 예술의 유학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나라에 유학올 것 같지는 않다. 어째서일까? 결국은 주체는 유출이다. 유가 주이고, 체는 출이다. 수학적 방정식의 이름으로서, 육체는 육출이기 때문이다. 뭔가 계속해서 심상치 않다. 주체는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찬란한 지중해 점령기처럼, 정신을 구약의 유대인들과 서로 싸우면서까지 전파하는 것에 있다. 옆에서 배신자 유다나 에덴의 뱀 같은 이가, 너는 결국 선교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떠들 수 있다. 그것의 사과 햇빛.
유학이 문제가 아니라, 위기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위기시에 미국과 유럽은 반응이 이와 같다. 하나는 할리데이비슨. 하나는 듀카티. 아무리 도시가 세계 제일이더라도, 사람이 핑계의 땅을 사기 시작하면, 곧 있으면 동일시가 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울릉도의 사람들처럼 기독교 인구가 늘지 않을 수 없다. 돈이 많고, 인구가 많고, 땅이 많고, 도시가 많고, 도서관이 많고, 이런저런 신학교까지 하면 학교도 많기 때문에, 관념이 유치하게 부딪힐 시에는 무한한 재산을 가진 사람처럼 지지않을 시간이라기에는 그렇고 공간인 셈이다. 비행기는 라이트형제가 만들었지만, 그와 같은 초등학교 위인전보다 중요한 것이, 미국에는 할리 말고는 별다른 오토바이 회사가 없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자칭 역사적 주체의 말을 들어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주체가 모두가 되자고 하면, 그들은 할 일이 얼마나 없는데, 그렇게 스스로 바쁜 척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할리 데이비슨이다. 우리나라와 관계가 유학적이고, 유기적이며, 뭔지 모르게 숨가쁜 것은, 터미네이터 2처럼, 그것은 미국과 유럽의 관계나, 미국과 미국 내의 관계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관계이기 때문에, 어쩌면 덩달아 사과 향기가 인간 본연적인 기쁨이고, 기독교 신앙이며, 인문학이겠거니, 다시금 덩달아 오줌발이 타기 때문이다. 눈은 신체 특정 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유럽은 국가가 쪼개져 있고, 오토바이 회사도 생각보다, 괜찮은 것으로 꽤 있다. 내가 잘 모르는 것들도 있다. 아플릴리아는 제법 유명하고, 케이티엠은 디자인이 아주 빼어난데도 내가 잘 모르는 회사이다. 뭐에 써먹는 것인지 잘 모른다는, 내 중심의 시니피에가 있다??...... 정말 수상하다...... 그래도 단단하고, 철갑 같고, 훌륭하게 어떻게든지 한국을 잘 아나 자기들은 분명히 유럽의 기사라는 느낌이 있다. 위기가 발생하면, 듀카티는 이중의 세계를 구사한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얼마나 할 일이 없는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앞에 두고 미세한 동작들에서 완전히 존재를 제거하는 나쁜 동작이기보다는, 워낙에 조금 똑똑한 편이어서, 자기 생명 구제적으로도 그런 게 나오는 것이다. 대신에 희생되는 것들은, 완전히 카테고리화 되어 있는 야수파가 아니라, 진실로 주체에 합당한 야만적인 느낌. 바바라 스트라이잰드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나를 보는 것도 있고?? 바바라 스트라이잰드를 보는 것도 있다. 그러나 저마다 존재와 생명, 생존의 방식과, 모두스 비밴디를 달성하고 있기 때문에 덕성이 아주 차고 넘친다. 주체는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 같은, 관념의 성리학에서 마침내 증명되게 되어 있다. 유학은 내가 미국을 갔을 때, 듀카티를 타는 봄가을의 풍경, 캐나다로 메이플 투어를 다녀오는 항목으로도 데스티네이션원투쓰리가 되는 것이다. 유럽은 미국이 싫다. 그것은 자기의 성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이고, 비슷한 백인 지배의 사회가 보다 강성하다는 데에 대한 원망이다. 아무런 근거도, 설명도, 분석도, 애널리스트도 없다. 미국은 유럽이 무섭고, 비인간적이다. 역사가 아주 그렇고, 철학은 무조건 알 수가 없다. 내가 유럽에 갔을 때, 할리의 로드킹이나 팻보이를 탈 수 있다. 유럽의 디자인이 좋긴 하나, 사람들이 민숭하고, 은근히 좁아터지고, 깊은 고단백의 니힐리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들에게 예시를 하기 위해서도, 할리의 여름날 소나기 구름 같은 두카당스의 철학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복한 이백일몽은 주체에 관한 물음에 소환되어서 언제나 깨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제 오토바이는 어디서 타겠다는 것인가? 이것도 참으로 깊은 미궁이다. 내가 지금 한국에서 타고 있지만, 그래서 그것은 내가 얼마나 지독한 한국 사람인지 증명하는 불국사인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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