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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단재 신채호와 윤상, 미션 임파서블 같은 게르마니아적인 하모니

by 마음대로다 2014. 9. 16.

단재 신채호와 윤상, 미션 임파서블 같은 게르마니아적인 하모니

 

 

 

 

 

 

 

 

사람들은 말한다. 취직 공부를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냐고. 대게의 중생들은 학교에 다시 가서, 이렇게 남는 시간이 많구나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일단, 공부했던 것을 다시 하는 편법자강이 그런 의식을 보다 촉진시키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시간이 많이 남는데, 공부만 했다고 자기를 회고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용기. 그렇지 않은가? 사발면. 그리고 맺고 끊음. 그것은 뭔지 모르게, ABO 이소룡 같은. 이소룡의 권법을 유명한 중국인 사부가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또한 영춘권의 대부였다고 한다. 갓파더. 그렇다면 우리는 맺고 끊기를 잘 못해서 공부만 느립다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망토론, 공부만 느립다 하다 보니까, 맺고 끊기를 못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의 아둔한 손. 호로비츠를 위하여 한국 영화?를 보면, 엄정화가 내 손이 예쁘다고 그렇게 칭찬하지 마지 않는 가사가 나오는데, 뉴스를 보다 보면, 뉴스는 왠지 모르게 무스 같고, 다림질 같고, 스트레이트 파마 같고, 유선 같고, 삼국지, 늘씬한 것 같은, 뉴스, 그런 느낌이 종합적으로 있는데, 사람들이 세로형의 반듯한 적당히 오래고 비싼 건물들 사이에서 포토 타임 갖는다는 것이, 타임이란.......

 

 

홍상수가 보다 본격적으로 정치인들을 다루기 시작할 무렵, 기적과 같은 불가능성 위에서, 상상해본다고 하면, 다음 장면은 자동세차장 안에 있는 나를 카메라 잡을 것이다. 윤상의 노래가 그윽하게 들려오는 것은, 내가 깨끗하다는 것인가? 아니 깨끗하다는 것인가? 박진희를 검색하다 보면 늘 박희진이 나오곤 했는데, 그것의 안성댁........

 

 

 

단재 신채호를 보면, 국사학자나 사상가로 별로 보이지 않는 대목이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란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했던 것도, 중국인 감독의 비상한 지적으로 하면, 영락없이 아비정전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의 조선상고사를 읽다 보면, 깨는, 그래서 단지 그것의 황인영으로만 나아간다고 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영화를 보면 그런 내용이 등장한다. 아비정전은 갈림길이었는데, 혹은 교차로, 혹은 벼룩시장, 사람들에게 공짜 가구와 저렴하고 좋은 집 알맞은 알바 자리를 줄 듯 싶더니, 다만 장국영의 춤추는 내용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내가 만일 유격장의 조교로서, 별명이 붙여진다면, 평양냉혹이라고 할 만 할 것이다. 면발이 서로 붙어서. 썸쏘트오브에스떼티칼 오브제 같은. 먹을 게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언어유희적 여자........

 

 

우리는 겨울철에 자동세차를 한 다음에, 서울의 숱한 언덕길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경상학부에서 이름이 여자 같아서 여자인 줄 알았던 교수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고급한 전선이요, 투쟁의 율법이다 할 만 했다. 그러나 나는, 윤소영, 읽을 수가 없었다. 목적이 믿음인 사람에게, 율법의 현질 같은 것은 양보 밖에는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조익표 전철이라는 사람들과 서울에서, 가든 오피스텔, 별빛처럼 아름다운 세미나를 했던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인가? 조영희는 가장 관지림을 닮았었다. 마치 혜성처럼 지구에 가장 가까울 때가 있고, 지구와 태양, 다시금 태양계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또 내 주변에 당장에 서울 여자가 없으니, 마치 그런 방화가 있던 것처럼, 이공계를 아는 척 해야 하는 의무로서의, 의성어적인, 마치 어떤 여배우의 신음소리 같은 십육기가 바이트, 사람이 서로 빙글빙글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살다가 그것이 부딪혀서 깔면 인수한다는 원칙에 따라, 나와 매치가 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념형 인간이었고, 그들은 장방형의 그렇다고 못나지 않는 조영희들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세미나 분위기가 좋았다. 왜냐하면, 제일 처음에는 전부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런 어린 시절의 교회감 의존감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믿음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독재는 서울에서는 향기요, 내 자신에게는 독기가 되는 그것의 냄새는, 관계의 재미를 온통 사그라뜨렸다. 끝까지 잘 모르겠는 화이트헤드의 말들이, 그렇다면 조심성 있게, 그래도 재밌다, 좋다, 헤겔 다음으로 배울 만 하다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사도세자처럼 뒤주에 들어간 상태에서 조영희가 세상에서 가장 관지림에 가까운 얼굴로 나를 찾아올 수 있었는데, 나는 마치 배운 것이 헤겔 밖에 없는 사람처럼, 화이트 헤드가 영원적 목적으로다가 혹은 영원적 객체로다가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목적이 믿음인데, 율법의 현질은 도저히 접수 창구에 접수가 되지 않는 남의 소포 같은 것인 것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건물의 부스러기를 모아서, 물에 타 먹는 것인데, 그것이 소화가 된다는 것으로 측정하는 비상한 항목이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탈락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기상, 그와 같은 햇빛 조건, 숱한, 반복적인, 당사자는 알지 못하는, 태양계 같은 무지개, 서울도 생태 도시이니까, 그리고 내게 먹을 것을 건네는 어떤 여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단지 물에 타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는 것 같은 착각. 대신에 나는 극심한 고통으로, 프레스로, 쓰러질 정도에 있지만, 그래도 가끔 전철을 타고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한바탕 듣고 오면 그날 에너지는 충전할 수 있었던 엘.티.이. 마치 이 모든 것을 단재 신채호가 의도한 것이라면,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독일철학의 임진강 임석진 다른 독일철학자를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워낙에 정신현상학의 번역이 노역이었을 것이다는 동정심에, 만일 그가 바라본 미래 도시 서울의 풍경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폴리탄들은 중국말을 쓸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일본어를 쓸 때마다 눈물을 참으려고 오디오비디오를 찍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미는 본래 의식 안에서 가지런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어가 의미가 다만 같은 의미로만 있다면, 자기가 어떻게 어렵게 발음을 하고 있는지 의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멘독사 일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미에 신경을 쓰려고 할 때마다, 어느새 한 여름날에 훈도시만 입고 불을 지피려고 하는 장자크 루쏘처럼만 보이는 것이다. 의미가 먼저이겠는가? 아니면 유럽이 먼저이겠는가? 감성의 체적이 먼저이겠는가? 아니면 이차대전의 전쟁대상국 미국이 먼저이겠는가? 한국은 알 수도 없고, 알레야, 알레한도르, 정말이지 알타리메요 할 수 밖에 없다. 폴리탄들에게는, 한국은 남자건 여자건, 시간이 되면 정장을 하고, 서울 극장에서 최신 한국 영화를 보고, 강원도로 가서 단풍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하다 왔다는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화를 사랑하는, 그것의 커먼웰쓰, 혼자 태종대의 절벽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보다 시퍼런 바다를 보고 온 사람들의 눈으로는 도리어 감성의 역진 상태, 가슴이 큰 여자가 나의 시선 앞에서 이동하는 것과 같은, 신혼 부부의 매우 안방(안빵)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니 두 개의 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죽을 맛인데, 등단도 안되고, 돈도 없고, 서울대도 못가고 있는데........

 

 

*

 

 

몽고어를 쓸 때는 이르크추크. 삼일 정도를 운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옛날 신성로마제국이 성립하기 전의 게르만의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우연치 않게, 한 남자의 우화라는 인스트루멘탈 음악은 그것을 내게 보고하고, 숱한 지하철 케비넷 중 하나에 보관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