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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중국학과 여학생. 그리고 헤어짐의 단순한 동기.....

by 마음대로다 2014. 10. 9.

중국학과 여학생. 그리고 헤어짐의 단순한 동기.....

 

 

 

 

 

 

 

 

만일 우리나라가 적화되어서, 특별한 인민분과 사람들이 나를 연행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게끔 하면 나는 목에 팻말을 달고, 마치 중국에서 있었던 일처럼, 말은 하고, 목은 잘리고, 명예도, 인치심도 사라지는 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계로써 상대방을 제압하고, 폭력으로써 상대방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내가 손도 대지 않고, 상대방을 그렇게 하였다는 것. 그 사람도 모르는 가능성을 두고 그랬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재산으로서의 기계요, 지식으로서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위했다고 하기에는, 사람들은 나를 안위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학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옛날 식당이 아직도 하나 있어서, 들러서 순대국을 먹으려고 했었다. 딴 걸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궁금증이 있었던 것을 하나 물어볼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올드보이 비지엠이요, 비가 오지 않으면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올드보이 비지엠이다. 이름이 뭐였죠? 중국학과 여학생. 이름을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떠오르지가 않아서. 얼마나 나는 머리 속이 무등산의 서석대 입석대 같은 메트로 폴리스인가? 십팔세기 영문학, 그것의 세익스피어적인 정리의 문예적 주장 중에, 액션의 삼단일이라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액션의 세 가지 요소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대. 날짜. 그랬던가? 인물. 무대. 날짜? 그랬던가. 그러나 사람은, 거대한 흰 빛에 자기가 삼켜지고 나면, 모든 생각은, 머리 털은, 그나마 대머리라고 하는 대지 위에서 자라난다는 것의 각성이 생긴다. 학교는 사라지고, 철학적 본질, 그리고 머리 털, 실존주의, 그것의 중간 지역으로서의, 빛나리 같은 아.저.씨. 우리가 주소지 불분명의 스님들을 인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인가? 그들이 염불을 잘해서인가? 그들이 이런저런 오래된 사찰을 잘 알아서인가? 다만 그들의 버티기가 될 것이다. 뻥티기도 약간 비슷한 내용을 품고 있다. 그것의 사각사각함과, 이내 입속에서 말미잘이 되는 것은, 내가 이씀이라는, 나만의 썬데이서울의 있음과 없음이 되겠기 때문이다. 식당 아주머니가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다. 이름이 현.정.이.라고 했다. 김현정인가? 나는 올드보이 비지엠의 대사, 뭐요? 기분에는 꼭 그랬다.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현정이요? 그래. 현정이. 나는 내가 먹던 밥그릇을 보면서, 우째 이런 일이 했었다.........

 

 

그것은 건축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국방부 심리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성경에 요셉이 몇 번 등장하고, 이사야가 이새와 이름이 비슷하고, 요나와 바요나 시몬하고 이름이 비슷하고, 내 이름 신현균이 신학교와 신학과와 비슷하고, 심지어는 심학규와도 비슷한, 그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도심에서의 따뜻한 정전 사태.......

 

 

나는 중국학과 여학생과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러니 정현이와는 너무 빨리, 아무 것도 없이 헤어진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심리전의 깊은 경사지 위에서,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람과 같았다. 많이 배워서는 안된다. 배워봤자, 짱박히는 습관만 늘 뿐이다. 그렇다고 많이 읽지 않으면 안된다. 프랑스 현대 철학 같은 것은 거의 모든 것을 사서 비치해놓고 있어야 한다. 유도를 하고자 한다면, 늘 언제나 롤랑 바르트의 책이 좋다. 처음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루비 장식이더니, 갈수록 볼품 없는 백색 가전이 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냉장고는 멀어진다. 오직 펑션으로만, 그러니까 가창력 없는 퍼포먼스로만 승부하는 가수들처럼, 지평선 저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용광로가 철저하고, 기계적 설치가 정확하다면, 다시금 백색의 스포츠 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리석처럼 높고 근사하게 만들고 나면, 롤랑 바르트는 다시금 볼품 없는 프랑스 말로 불량배나 되는 것이다. 그것의 인은 배고픔이라던지, 옷의 먼지라든지, 오래도록 아끼는 중고 물품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는 교회를 거절하는 것이다. 교회에 갈 수 있는 유일한 성적 자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철학자들의 펑셔널 인테그러티를 묘하게 시종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체크 메이트. 인테그러티 그 자체를 갖기란 것은, 말이 쉽지, 요원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중국학과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케이블 카를 타야 하는 어떤 고산족 아이들처럼, 처지가 가난하고 무시무시했다. 나는 나의 신체가 강탈당한 듯한 느낌이었고, 맑고 투명한 코피를 흘려야 했다. 그들의 혁명의 역사는 다만 가난임에 분명할 것이다. 인간 그 자체가 마음이 가난한데 어디에서, 어느 곳에서, 맑고 투명한 이념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겠는가? 고전은 이유가 된다. 현대적인 필로소피가 그래도 공산주의에게 한 방을 내어주는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피어나지 못하는. 늘 언제나, 고전은 이유가 된다. 소동파라든지. 동파육이라든지. 매월당 김시습이라든지. 우리는 시들끼리 서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실질적으로 둘은 사랑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철학과 여학생과는 아무 것도 아닌 채로 헤어진 것인가? 그러나 팔십점을 맞았다. 그것의 시험은 쪽지와 같았다. 감탄고토. 달면 삼키고, 써도 삼킨다와 같은 박력. 종교적 흐름 앞에서 형제주의적이고, 창작으로서의 신문법을 주장하는 이원필의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맞춰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기계 앞에 서 있었고, 그녀에게 입장권을 요구하는 폭력을 어쩔 수 없이 발설했는지 모른다. 중국 사람들이 이런 나를 미워해서, 형장의 이슬람으로 삼는다고 해도 나는 피하지 않으리라. 나는 음식을 시키면서, 그것의 한정자산, 금치산적 산양 오토바이, 에스와이엠, 그녀에게 순두부찌게를 먹어라고 했다. 나도 그것을 먹었던가 했었다. 여자는 갑자기 항거했다. 에브럽틀리. 소리를 지르듯이 항거했다. 문학적인 클리쉐 같기도 했다. 저 멀리에서 갓지어진 혁명복을 여기서도 입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내 말이 많이 미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폭력적으로, 너는 순두부찌게를 먹어라 했던가 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래요. 오빠. 순두부찌게 먹을게요 하겠는가?.......

 

 

 

딴 음식을 먹으면, 영혼이 강탈당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길을 잘못 들어, 영원히 셋집 살이를 산단 말인가? 순두부찌게가 거기 음식점이 한중일 삼국에 걸쳐 최고라는 소리인가?

 

 

 

그때문에 나는 형장의 이슬람이 되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다만 저주하는 소리로, 그것도 이불 당겨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의 씨아트리칼 액션은 많이 언더더 리밋 했었다. 화문이 없으니, 당을 구성하는, 주체가 없으니, 고집을 피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