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 엣지오브터머로우(2014): 애플머니에 대한 보편적인 쟁탈전......
옛말에 여우(actress) 같은 아내와는 살아도, 곰 같은 아내와는 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중층적이고, 중첩적이다. 오늘 사랑의 교회 지어진 것을 보츠와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사람 같은 아내와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유적 판단으로 내려가, 동물 중에 하나를 취해야 하는 경우, 마음이 이미 흐트러지게 된다. 그것은 내가 서울대 대학원 입시에서 경험했던 것일 것이다. 내 나라 내 땅에서, 가장 알피엠이 높은 사람들과 교우하면서, 나의 말을 윤담글질 하고 싶었던 마음. 영어도 나는 사랑하였다. 워낙에 사람들이, 학생들이, 학도병으로서 영어 공부하면서 피를 한강만큼, 만경강 만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또하나의 정준하를 두 번 죽이는 꼴인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브레인서바이벌. 앞뒤 하나 생각나지 않고, 정준하가 자기를 두 번 죽이는 꼴이라는 하소연을 했던 것만 기억한다. 그리고 그 영단어. 브레인. 그것은 아무리 던지고 막던져도, 서울의 소녀들을 마음 무겁게 하는 외래어인 것이다. 그리고 번뇌. 더군다나 백팔 번뇌. 염주라는 것. 그것은 필시, 여성적인 모음이 분명한 것이다. 브레인은 백팔 염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뇌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 점점 더 감성적이고, 여성적이며, 동호회적이며, 로즈적인 것을 구한다. 남자라고 뇌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통의 뇌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왕양명, 왕씨 성의 중국 사람마저도 자기만의 캐츠를 심즉리라고 했겠는가? 여자는 실패를 굴려서, 서초 국립 도서관에서부터, 여우가 되고자 하는 방편을 강구한다. 곰은 일본어로 쿠마라고 한다. 여우처럼, 그러니까 액트리스, 날랜 종이 되고자 하는데, 그것도 아니되면, 여우를 적당한 거리에서 저주하는 곰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둘다 남편을 둘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이와 같은 것도 하늘이 높다. 염두에 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옛날부터 작가주의 영화라고 불리었다. 계속적인 상호작가, 내부작가, 그것의 끝에서, 엣지오브터머로우는 그 한 케이스를 우리에게 선비쳐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어디인가? 도코니? 도코니 이룬다. 클래식 음악을 두고, 자음과 모음을 맞춰보려는 노력이 아닌가 한다. 신라시대 육두품 이상의 계급에서나,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아는 척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평생. 우리는 올웨이즈. 클래식을 두고 잘난 척 할 수 있는 성난 파도를 넘을 수 있느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이악장, 불멸의 고튀세, 하는 것의 실랑이 속에서 사는지 모른다. 문학 하는 사람은 유적으로 남아 있는 유리알 목걸이를 은연 중에 목에 걸고, 아는 척을 할 수가 있다. 음악은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끽해야, 곰이고, 여우이며, 흑염소이다. 무어인의 방이라는 작품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언어 장애가 있어요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등한 다른 작품들은 언어 장애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서동왕자에게 찾아간 선화공주가 아름다운 바이올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녀에게 악마는 캔슬을 걸어서, 어감적인 측면에서, 연주는 기가 막히게 할 수 있으나, 서동왕자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못하게 된 것이다. 서동왕자는 눈에 파묻혀 죽는 한이 있어도,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늘 언제나, 말이 걸쭉한 남정네 화랑들이나, 여우 같은 도에 능통한 아녀자가 있으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를 잘하면 다른 것은 자연히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리언적인 믿음이다. 분절의 황태자는 분명, 언어의 연금술사가 된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던 플라톤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는 비극인 게 아니라, 아벨에게 좋은 집을 지어주어, 말도 주고, 행복하게 잘살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영화가 비극으로 치닫는 것은, 웃음의 페이소스적인 오케스트라, 딱 이 정도의 딱지를 어쩔 수 없이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배움은 분명, 그것의 피크에 이르러서, 캠핑이고, 캠퍼스이다. 만일 동명사가 그렇게도 필요하다 한다면, 캠퍼스핑이다. 고레와, 고레와, 좋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훌륭한 말들을 많이 할 수 있는........
예전에 그랬던 때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추위를 추스렀다. 민주주의의 고삐를 바짝 당겼으며, 팝송이 그것의 딱 한 건반 정도 되었을 때. 벨을 두 번 누르고, 정신을 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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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엣지는 우리에게만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영문학에도, 슬픔의 소총으로 만들어진 이불 같으다. 사람은 춥기 때문에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춥다. 어렸을 때는 백이퍼센트이지만, 그래서 이퍼센트가 없어도 눈에 띠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구십팔퍼센트이기 때문에, 그 중에 이퍼센트가 더 나가면 눈에 확 들어오고 만다. 영화 엣지는 우리에게 미국 문화의 앞잡이도 같지만, 정작 미국이나 유럽을 향해서는 알카라인 한국 영화의 앞잡이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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