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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카운트 다운(2011): 어제 나는 마음껏 울었다.

by 마음대로다 2014. 10. 16.

카운트 다운(2011): 어제 나는 마음껏 울었다.

 

 

 

 

 

 

 

 

인터넷으로 나는 에프학점의 천재들이라는 방화를 조금 보다가, 저녁에는 카운트 다운을 보았다. 하루 종일 성경 공부하느라고,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했었다. 에프학점의 천재들에 원미경이 나온다고 하길래 보았더니만, 영화 사분의 일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카운트 다운은 대충 스틸 사진이 삭막하고, 김치찌게 냄새나고, 돈만 있으면 화투 치고 돌아다닐 그 옛날 나의 시내 시절?을 상기시키는 듯 해서, 보게 되었다. 배우들이 식상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홍콩 영화식 악몽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 문예학을 공부하게끔 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지속적인 감각을 자기 자신부터 상실해도 된다는 식의 내면적인 포기성을 조장하게끔도 한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법. 남이 도덕적으로도 잘되는 것에 의지해서, 의타기, 사는 것도 볼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카운트 다운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며칠 전에는 엣지오브터머러우를 재밌게 봐서, 영화는 영화를 낳는 법, 좋은 한국 영화가 없으면, 내가 그냥 좋은 영화를 안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베토벤의 미뉴엣 랄라랄라라라라.......

 

사람은 심정의 채널로 산다.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나의 대중적인 에세이의 제목을 어제 나는 마음껏 울었다 하는 것으로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용은 이런저런 사찰을 돌아다니는 것들이다. 우는 장면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냥, 음식이 맛있었고, 돌아다니는 데 조금 피곤했고, 찜질방에서 모처럼 하룻밤을 잤는데,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마치 하룻밤을 꼬박 샌 것처럼 피곤하였다 그런 내용으로 점철되는 내용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가다가, 내장산이 보이기 전의 산들이, 그러니까 군산들이 서로 이어져 보이는 것이 있었다는. 그러다가 내장산이 나타났는데, 나는 무슨 거대한 사각형이 저렇게도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 그것은 전도연의 성격에 대한 묘사와도 일치한다. 거짓말이 아닌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과 글속에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없다는 수학적 사실만을 가리킬 뿐이다. 사람은 모두 다 거짓말을 하고 산다. 책방의 책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스릴에 입이 낚여 하늘로 올라가는 물고기들의 운명일 수가 있다. 어제 나는 마음껏 울었다 하는 천국의 책방에서의 책 제목은, 그것들의 연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바깥에서 사람들 소리. 기계 소리. 자기 마음 안의 훈육관 소리. 지금 나와 맞짱 트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금 나와 논쟁하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소리. 돌어오면서 남자 친구가 사준 레드 제플린 음악을 듣는 것이다. 남자 보컬이 어마어마한 기계 소리를 뒤로 하고, 히하우이이이 히이후우우이 하는 것이 듣기가 좋았다. 듣기 평가라는 것은 있지만, 마을 버스에서는, 마치 무당집의 굿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남이 정해주는 것도 없고, 내가 정하는 것도 없다. 그러다가 휴일을 만나면, 하루 종일 tv를 본다. 티비가 바보상자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형식으로 표현하면, 은혜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은혜로써 세상 사람들을 만나면, 전도연처럼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받는다. 일부로 재미 없는 포로를 보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다. 티비 포로들은 여러가지이고, 재미 없는 것을 한 시간 일부러 볼 줄 안다고 한다면, 사회 나가서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그런 것들을 키운다. 그러나 당진, 그와 같은 마음의 근육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당진 속에서. 차라리 그와 같은 병법을 취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회사원의 모토가 있다면, 그것은 천씨씨급에서는, 고단한 회사일과 당진 속에서이다. 술 먹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은, 별게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의 설치미술과, 동영상과, 미장센과, 에피퍼니는 가공할 만 하다. 그들의 사채빚 추심원까지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군무의 전경이다. 지금의 영화나 음악, 그리고 문학과 교수들도 그와 같은 핏빛 샐러드맨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에 깊이 빠져 있다. 안그럴려고 해도, 어딘가에 특화된 도시를 짓는다, 특화된 거리를 조성한다, 책이 가장 도시를 상대로 가공의 사각형 입방체를 한자로 쓴다고 해도, 또한 특화된 공간을 구성하면, 왠지 모르게 물고기와 인간의 중간 형태의 부레가 바깥으로 나와서 히트를 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단초가 있을 것이다. 뭔가, 생각의 단초, 사건의 실마리. 최소한 본전(혼다)라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는 애타는 추심이 그래서 생기게 된다.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동네 사랑이야기 같은가? 한 작품을 좋아하고, 그것을 두고 개인적인 평을 단다는 것이 얼마나, 대도시를 상대로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인 것인가? 그래서 현실 작가들은 대게 성에 약하다. 남자들이 죄다 난봉이요, 여자들이 젠부 갈보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 이름 난봉황, 어쩌다가 도중에 죽는지 나는 나의 깊은 성명학은 그것만을 영화 보는 내내 슬퍼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동작은 기본적으로 난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 안에서, 도시와 싸우다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단한 회사일과 당진 속에서 하는 유혹은 또다시 작가의 심장을 찌르고, 국문학자들은, 국문학과 졸업생들은 출구조사에서 자기 영혼을 사채빚 추심원에게 그냥 넘기고 만다. 아주 비상한 한국주의자,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자나, 한국 사람들은 독특한 사생결이 있어서, 차라리 대학 다닐 때 배우는 문학심이 조금 약한 것으로다가, 현실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어느 보이지 않는 권력이 판단하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영혼주의가 발달한 영문학에서, 그리고 그것의 두 배가 되는 교회에서나 배우는 것이라고. 한국은. 한국은 다만 한국 영화 카운트 다운에서처럼, 자기 땅에서조차 싸우지 못하고, 밤바다 어두운 항구의 잘 모르는 철선 위에서나 그런 것들이 부딪히는 것이라고........

 

 

 

 

나의 책이 출간이 된다. 어제 나는 마음껏 울었다. 사람들은 작가가 잘 모르겠는데, 잘 안우는 것 같다는 인식, 그런 어쩌면 일찍 죽은 사람의 묘비명.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음악 좋은 카페를 다녀와서, 많이 울었다고 하는, 우리식 낭만주의의 극치. 암연 정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고단한 회사일과 당진 속에서 에서 벗어나, 하루 나절 읽을 수 있는 남자 목소리다 싶은

 

 

 

 

 

 

등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