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학생의 바담풍들과 누군가는 바람풍이겠지 하는 고급스러운 믿음에 관하여
믿음은 무거운 것이다. 부비추랩 같은 시골 사람들의 기독교 믿음이라는 것이, 또다시 선율을 괴롭히고, 그것의 지성소를 훼파한다. 둘다 무겁다고 할 때, 우리는 덜 무거운 것을 찾거나, 더 불쌍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스님들이 자기들 머리돌 같은 것은 보지 못하고, 늘 대웅전 뒷뜰의 산세며 암벽을 자랑하는 인간의 마지막 영화처럼. 원래는 필름도 없어야 그것의 마지막 위암이나 대장암을 아는데, 다행히 필름이 있고, 그것은 어떻게든지 파핑현준 선율을 살리는 결과를 낳는다. tv에서 시골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기초적으로 학교에서 물이 흐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가끔 보는 것은 좋다. 그리고 전문적인 프로그램인 것도 좋다. 그러나 묘하게, 선율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비단구렁이처럼 들어와 꽈리를 틀고 있는 것들을 또한 신봉하는 사람들로써 에둘러 보고 있는 조건들을 보자면, 우리나라가 완벽한 복지국가라는 느낌 밖에는 더 드는 것이 없다. 그것의 불만의 지평선 도시 김제는 어디서 유래하고, 서서히 퍼져나가, 현해탄을 건너고, 서해를 건너서, 중원을 장악하는가? 취직과 결혼이 학교를 대신할 수가 있다. 학교를 취직처럼, 또는 결혼처럼 다니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선율처럼 학교를 다녔던 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는 단독자, 특수개별자이기도 하고, 일반자 혹은 더 넓게 말하면 학교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사람까지를 아우르는 보편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연예인을 보고, 자기와 연애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비닐옷을 늘 입듯이. 우리는 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위해 힘쓰며, 급식비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교 어머니회가 아니라, 아버지회가 처음으로 발족하여서, 그것의 반절을, 혹은 그것의 전부를 완충하는 일을 도모하는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취직 공부를 하는 것은, 대학교 언저리 어디쯤에 독서와 오토바이의 콜라보레이션 동아리가 있어서, 그것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이번에는 죽도를 가지고 출사하는 한 회원을 보는 듯한 사물놀이적 흥분과 휘크. 중간고사 시험 공부도 다 하고, 중간고사의 노예가 되지 않고, 기업 스카우트 모임에도 다녀왔는데도, 그것으로 뇌가 물이 가득 차지 않는 것 같은. 음악도 듣고, 두꺼운 소설도 읽는. 서울 학생 같은. 그런 것을 다 하면, 사람이 공격적이지도 못하고, 악어 지갑도 가지지를 못하는데, 힘도 없고, 물러 터지고, 유약해지며, 남자가 고려청자 같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던지, 은행나무침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마는데, 다행히 일본의 사카린을 카메라 기법이라든지, 일제 오토바이라든지, 안전 그물 위에 떨어진 듯한 것으로다가, 도리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던지, 공중을 나는 무슨 제트호의 비밀 같은 것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화책을 보다가, 시간을 놓치고, 만화책을 보다가 시간을 놓치고, 심지어는 연애라고 하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사람들은 인문학의 논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늘 언제나, 대기업 예비 모임에 다녀와서, 그곳에서 섹스를 초월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바쁨의, 안해봐서 모르지만 노예적 야근, 때로는 남의 나라 영화처럼 괴물을 보고, 카니발리즘을 보고, 그것에 관련한 경제 지표와 예산 편성 소모임 같은 것을 무슨 산헤드린의 모임인 것처럼 좋아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번만 더 가 보고, 분절하여도, 순식간에 이븐이 되던지, 도리어 차원과 실제적인 우위를 인문학적인 문장이 가진다는 것을 아는데도, 관념은 관념끼리 통하고 육체는 육체끼리 통한다는 처세술로만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고 하는 것이다. 경제적 관념은 그래서,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를 양산하는데, 그들은 남의 나라 영화로서의 카니발리즘에 마침내 내 어머니의 단어로서 소랍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생산이 이뤄진 것이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멈추고, 그것의 색깔이 모두 빠지고, 코팅 종이에 힘이 없어지는 만큼 죽음이 연장된다고 하면 우리가 믿을 수 없지 않는가? 비유를 하자면, 심지어는 그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사실에는, 오직 학교 힘과 선율의 여자 친구만이 이를 수 있고, 주변적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어째서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보다, 텍틱스 같은 게임과, 쓰리디액션 게임을 청년들이 좋아하는가 묻고 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 그와 같은 유사서울성의 체적과 규모 파악에,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한 인지가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용기와 믿음을 갖고 죽어간 청년들의 숫자이다. 기독교는 그와 같은 믿음을 벼랑끝까지 품고 나아가는 철학이다. 그러니, 죽은 자가 생명이고, 사는 자와 연장하는 자가 그와 같은 함정을 파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사는 분명, 사는 자와 연장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날로그의 어떤 시침일 때, 혹은 분침일 때, 도리어 계급 의식을 양산하고, 게토를 제안하고, 인종에 관한 숱한 프랭키들을 양산할 수 있는지 모른다.
기독교적이든지, 아니면 세상적이든지, 믿음은 그와 같은 것들의 드라마이아이스이다.
죽음의 지시체로서의, 부질 없고, 누군가 사람인줄 알고 결혼하는 효과만 같은......
소년소녀들은 다시금 기독교의 믿음을, 안녕하세요, 혹은 언제그랜냐는듯이, 골리앗으로서 만난다.
서울의 선율은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독서에 오토바이, 죽도까지 챙겼던, 음악애호가 선배는 거짓이었다는 사실 만이 널리 프롤레타리아트한다.......
괴물들의 언덕에 올라서......
어떤 미국 공포 영화(evil dead, 1982)의 한 장면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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