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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퐁네프의 연인들과 러브레터의 상관관계의 논문이 레미오디스 각 대학의 도서관에 비치되는 선율의 시선

by 마음대로다 2014. 11. 22.

퐁네프의 연인들과 러브레터의 상관관계의 논문이 레미오디스 각 대학의 도서관에 비치되는 선율의 시선

 

 

 

 

 

 

 

 

두 영화는 시간차가 있다. 배구에서는 시간차 공격이라고 한다. 하나는 구일년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오년도의 것이다. 둘 다 나는 영화관에서 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모든 신체부위가 질문의 대상이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아시 일본어로 종아리가 행복과 그리움의 대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성공적으로 군대를 다녀와서, 퐁네프의 운명이 러브레터의 것으로 승격되었다고 너무 단순하게 말하고 싶진 않다. 십진법. 그것은 너무 히도이한 말이고, 한국말로도 잔혹한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이 조금 높게만 떠도, 충분히 쳐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공을 칠 수 없게 된다. 공이 뜨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공의 궤적에서, 힘있게 평행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좀더 힘을 넣고, 좀더 스냅을 넣고, 좀더 공을 약간 위로 올리면, 타자의 눈에는 중간부터는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해서 스윙을 하지만, 마치 빨래줄처럼, 그것은 나중에 프로선수들은 약간 비싼 껌값처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소년 아마 야구에서는, 그런 끝까지 기운이 살아있는 공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기분으로는 배트를 조금도 맞지 않고, 공은 공의 운명을 살고, 서울에 살고, 배트는 그냥 아무런 시골에 사는 것 같은,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 생기는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또다시 브레히트의 망령에 휩싸인다. 기여코 한국 교수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경희대 여자 영문과 교수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잘 알지만, 그래도, 복잡적이고, 그때문에, 낯설기가 파견되며, 결국에는 태극기의 이마골로기가 탄생하는 것으로서는, 김정란, 김경란, 도정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구본근, 서울의 낯빛이 이지적인 사람들의 모임, 아무튼 그 사람이 정식 시험을 보기 전에 그나마 아는 것으로서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낯설게 되어 있다. 최근에 있었던 책값 파동도 그러하다. 나를 기준으로 보면, 무슨 책을 사야할지, 더 사볼 수 있을지, 별로 고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재진행형의 사람들은 좀더 시간 안에 싼값으로 책을 사보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해당 사이트가 멈추는 일까지 발생하였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문명국가인 것이다. 책은, 채소 같은, 장보기의 바구니에 담기는, 파향은, 양파향은, 또다시 인민무력부장 라미란이 대종상 수상 드레스를 입고 시장을 보고 나오면서, 반드시 킾해야 하는 방정식이자, 과거로부터의 타임머신인 것이다. 염소가 영어로, 독어로, goat이다. 염소는 종이를 먹을 수 있다. 인간은 종이를 먹을 수 없다. 우리 옛날에, 공부 못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종이를 먹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 그것의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라. 서울대 본고사 입시 문제, 너무 교설적이고, 파편현준스러우면, 대학원 입시 문제로 낼 수 있을 것이다. 종이를 먹다가 죽는 조건에 대해서 설명하라. 그것은 인간의 삶의 속도에 관한 문제이다. 사람은 반드시 성경을 보게 되어 있다. 기독교는 하루하루가 마지막의 삶이다. 대게의 사람은 삶을 유예한다. 연장은 좀더 낮은 것으로 계속해서 내려간다. 처음에는 직장이라는 선착장이고, 다음은 결혼이라는 배이다. 그리고 그 배 위에서 꼼짝도 못하고, 새우잡이를 해야하는 삶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채소밭을 일군다. 책을 일구고, 반드시 그것의 철학적 원소를 구한다. 이순신 장군이 백척이 넘는 적함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도, 채소밭을 일구고 철학적 원소를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전쟁의 말미에 전쟁처럼 죽어간 것도,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살다가도, 걸그룹을 좋아하고, 기독교인으로 살다가도, 걸그룹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보자면, 그가 죽었다는 역사적 증언들을 곧이 곧대로 믿을 것은 못되는 것이다. 서양으로 가서, 르네 데카르트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막강한 강철로 된 무지개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인문학이 아직 정식으로 제도화 되어 있지 않는 그노시스 단계의 학생에게 낯설게 되어 있다. 둘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한 사람은 선생이 되고, 한 사람은 보육 교사가 된다. 그러면 한강 다리 정도나 되고, 다만 남이섬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조금 회전의 반경을 넓힌다면, 겨울연가 정도........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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