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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결자해지, 수목극 왕의 얼굴 3편을 보고서......

by 마음대로다 2014. 11. 27.

결자해지, 수목극 왕의 얼굴 3편을 보고서......

 

 

 

 

 

 

 

 

 

 

 

일본 av 장르 중에 자궁파괴라는 것이 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로 내려가야, 자기가 하나님, 하나 뿐인 목숨의 귀한 연장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왕의 얼굴은, 다른 사람의 원작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에페수스가 덧붙여져서 자궁파괴 이름만 따온 것 같다. 그러나 촉발은 촉발이고, 본질은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나의 이야기를 펼쳐보이고자 한다. 나는 늘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금쪽 같은 말들을 할 수 없으니, 늘 새로이 듣는 것 같고, 새로 출발하는 것 같을 것이다. 시멘트가 빛을 잘 받으면, 그렇게 흰 색일 수가 없다. 거기다가 철봉을 박아서, 계단의 안전망을 하는 것이 우리네 서울 해방 이후 근대 건축의 처음이었다. 그것의 흔적, 흔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흔적일 것인데, 여기저기에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맑시즘이라도 할라치면, 재산이 꽤 있어야 했다는 역설. 그런 사람을 뽑았다는 것이 아니라, 배부름과 배고픔의 상승과 하강 곡선 속에서, 위선이든 참선이든 간에, 영혼의 배고픔을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사람이나, 루카치의 청년 저작처럼, 맑시즘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우나, 고우나, 둘이 합쳐 미우나고우나, 격동기 한반도에서의 좌파는 그런 식의 가족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데지그네이션일지언정, 혹은 독자반응비평일지언정, 참선의 클러스터를 우리에게 가져오게끔 하였다. 그러나 독재자 신현균의 눈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띠지 않았다. 왜냐하면, 점심에 밥을, 비빔밥을 먹고 나면, 일로에 내려가 각설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주에서 비빔밥을 유명하게 만들고, 이성계의 어진이 그것에 딱 있다 해도, 밥을 맛있게 먹고, 사람들에게 리의 세계로 이끌어줄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한강 다리가 건설되었는지.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문학가가 허영 같은 이광수처럼 많이 생겼고, 사회적 시위가 있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날개 달린 천사들마냥 성화가 되었었는지. 음악이 바하의 대위법처럼, 어느 때는 트롯으로 하다가, 그 순간 한국 식의 팝뮤직으로, 통키타로 질주하였으며, 찬송가는 빼놓더라도, 우리가 눈 밭에 가다가 쓰러져 잠이 들어 죽는 것 같은 찬송가는 빼놓더라도, 클래식 음악이 진리의 실재처럼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었었다. 그러니까, 바하의 대위법처럼, 그런 것이 있다보니까, 오음계든지, 칠음계든지.

 

 

음악을 듣지 않는 서울 사람은 없다. 음악이 없다고 한다면, 문명 자체가 나라의 가장 큰 도시의 인구 수가 백만 명도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인구수 천만 명 혹은 그 이상을 약속하는 것이다. 사람은 비장미가 없는 것으로서 반절을 살고, 비장미로서 반절을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의 인생에서는, 두 명의 남편을 뜻한다. 만일 성공적인 성리학이 있다면, 그는 비장미와 장미를 가로지르는 무기교적인 기교, 무음악적인 음악을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 그것의 기미를 잠깐 엿보는 것이기도 하다. 여자의 얼굴은 과에서 한 사람 예쁘다. 그것은 마치, 국정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외국인 방문단이 있어서, 연세대 국문과생들과 대담할 일이 있는데, 예쁜 여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면, 다 남학생이고, 머리 모양도 이상하고, 옷차림도 이상하고, 여학생이라고 있는데, 담담하고, 사납고, 예쁘긴 하나 작고, 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단번에 이 대학에는 코틀리 러브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가 보다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꼭 그러한 가상적인 현실, 버추얼 리얼러티가 발생할까 싶어서, 국정원 중의 국정원, 디모데적인 국정원이 발동하여서, 한 명씩은, 적어도 두 명씩은 그런 국가적인 스페이스에는 대표급 여학생들을 진출시키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이고, 두 다리 쭉 펴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아픔에 비하면, 지방 소도시 같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케이티엑스 시대에 서울을 한 번 가보지 않은 남자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은 저변, 낮게 드리우는 안개 같은 상태에서, 나는 서울에서 공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서울 사람은 무엇이라고 여기겠는가? 내가 곧 서울대학교라고 하지 않겠는가? 서울대학교의 제일 원칙, 그것은 다름 아닌 코틀리 러브이다. 그리고 남자를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세 사람을 언급한다면, 김상환을 이 학과의 선도부장으로 여기겠는가? 아니면 강영안, 아니면 유종호. 그나마 유종호가 학생이었다가, 다음 날에는 우수 학생, 다음 날에는 조교, 그 다음 날에는 예비 교수의 약속을 서로 나누고는 유학을 떠나는 사람으로 적합하다 할 것이다. 세상은 세상이고, 대학은 대학이다. 세상이란 다만 새를 그리는 것이고, 대학은 그것의 디자인과 공학을 지는 해를 뚧어가면서 공부하는 곳이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순간에 안심하지 못한다. 대학의 파괴는 막을 수 있었으나, 유종호를 메인으로 내세우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을 잘 키우고, 조성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는 계획을 마련하였지만, 김상환이 어느 틈에 트랜스젠더가 될 것 같고, 강영안이 의상 디자이너가 될 것 같으며, 유종호가 그냥 예총 회장이나 될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뜻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걷는 반듯한 길을 절벽에 나란한 길처럼 보이게끔 한다. 뛰어내려 보라. 천사들이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 우리는 염려가 그처럼 하늘에 이르지 못했고, 대학을 졸업하는 것에나 귀두의 관심을 가질 뿐이다. 여자들은 라합 같고, 다만 궁녀들 같다. 김상환이 트렌스젠더가 되는 순간, 그런 식의 분위기, 가능성,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도 기를 관리하는 소중한 작업이기 때문에, "내가 선배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그렇게 살면 안돼. 선배, 앞으로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임신시키고 살 것 아니야? 그렇게 살면, 그런 글을 쓸 것이 분명하지 않아? 안그래?" 김상환이 서울 바닥 어디에서도 그런 식의 청천벽력을 들어서, 해골 물을 마시고, 돌아와 원효대사가 되었다는, 자기 이야기, 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는 그렇게 써도 아무도 터치를 하지 않는, 샛누런 노터치인 것이다. 심포점 같은 데에서, 나누는 말은,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연히 지나가는 말을 잡아서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 없는 말을 나누었기 때문에, 재물 손괴죄나, 생물 살해죄, 공연 음란죄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보이지 않는 그 틈, 클리쉐, 자기가 시계를 세 개 사고, 네 개 사고, 카시오, 세이코, 카시오, 세이코, 신보가 나올 때마다 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는 학생들에게, 후배들에게, 나중에 교수가 되어서는, 철학과에서 그의 시계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런 선행에 앞서, 독특한 후기산업자본주의의 낭비벽이 있는 것이다. 문장은 퍼져나가고,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하게 구분짓는다. 단어의 우상을 학생들에게 심지 않으며, 그의 학생 중에,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자기의 선생짓에 대학이 있음을 아는 바로미터로 삼는다. 콜라보레이션. 갔다가, 다시금 완전히 젖어서, 혹은 반만 젖어서, 돌아와 학문을 하고자 하면, 최소생계비, 서울의 달동네, 중간생계비, 그것을 통해 근근이 연예인과 연애하는 서울대 철학과 졸업 '생의 단순 철학자로 세워서 응원한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나는 하는 짓이 유종호였으나, 식자건 무식자건 말이 명확하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들은 의외다 할 것이다.

 

 

 

내가 한신대 학생이다 싶으면, 날개가 들어갔고, 사람이 그것을 무위자연, 잘 모르는 호연지기로써 진행하다 보면, 늘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서, 사람들을 다그치고, 칭찬하고, 오직 철학자들만을 이야기하고, 극기복례하고, 그것의 생의 철학적 죽음의 타이밍을 맞춰보았을 것이다. 음악이 우리를 가로지르게 한다. 그와 같은 명제는, 늘 언제나 의도치 않는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와 친했고, 불교의 화가였으며, 국문학의 마지막 식민지 분위기의 소설가였다. 나의 소설을 보다 보면, 덕기도 보이고, 삵도 보이며, 금홍이 남편도 보인다. 염상섭과 이광수의 몇 장면은 마치 암덩어리를 들어내는 듯이,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 사람들은 나의 겉만을 보았다. 겉에는 옷도 있고, 말도 있고, 진행 방향이 있다. 담배 피우는 것도 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있다. 그러다가 나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태어났다. 주자 앞에서 나머지, 그러니까 영어로 하면 디 아더스의 속성은 매우 반복적인데, 그 중에 첫째의 것이 모른 척 하기이다.

 

 

 

 

그러다가 쇠라의 길을 걷는다.

 

 

 

 

우리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실은, 진지하고, 유식한 말을 나눌 줄 아는 남자 친구들의 도시와 기둥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쇠라의 길을 걷는 것은, 가장 먼저 남자들이 김상환처럼 트랜스젠더의 길을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학교에 모여 있었는지 모른다. 한신대에, 서울대에, 서강대에. 한신대가 팔할 이라면, 서울대 이할, 서강대 일할. 그것은 정말이지 윤상의 인스투루멘탈 뮤직이다. 가사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스투루멘탈 뮤직은, 그리고 적당한 허밍은, 누구도 완벽하게 채우지 않고, 다만 심증으로만 흘러가는 우리들의 존재론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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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주자는 이런 말을 듣는다. 후궁을 이미 넷을 두었는데, 다섯을 둔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면, 능히 우리는 주자학을 할 수가 있다. 여자들도 다만 국정원이 심어놓은 예쁜 여학생의 운명이나 굴레에서 벗어나, 남자에게, 혹은 주자에게 말을 건네고,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참 존재를 인정 받을 수가 있다.

 

 

 

죽음을 각오하면, 그러나 우리는 취직한다.........

 

 

 

 

 

 

끝없이 취직하고, 유종호는 예총 회장이 된다.

 

 

 

 

 

 

 

 

 

 

 

 

 

*사진은 인터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