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옛날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내가 소설을 쓸 때에, 이미 정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에는 무리가 아주 많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는 학문이 필요하다는 요청. 모두가 저마다의 이즘과 리를 갖고 물체를 구성하지만, 우리가 학문적인 글쓰기를 읽고 깊고 높은 소회에 잠기는 것과, 소설을 읽고 커피 마시고 tv를 낯설게 하기로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주의주의적 글쓰기가 있다고 한다면 내 선호하는 방향이라고 했겠지만, 또한 불분명한 말의 클러스터도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개인적으로, 혹은 범우주적으로 난감했던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앞으로의 가능성이라는 채점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학은 앞으로 그와 같은 중간적인 에세이, 중간적인 작품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지 같은 것이, 내가 제안하고, 내가 대답하고, 내가 서약하는 혼자만의 바쁨과 이즘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내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미달로 처리하였고, 그것을 통과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나는 단어를 만질 줄 알았다. 사람들은 고급한 바람 구멍이요, 향기 나는 보온통 같은 단어들이, 금세, 원산지 표시 추적을 당했고, 원산지야 어떻게 되었든 맛있으면 그만이지 하는 것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관심이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어 중에 종교의 것이 으뜸이다. 종교적인 단어에는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에밀레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각종 종의 단계일지언정, 다만 문학적인 재미라도 두드리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놀이꾼의 솜씨도 없는 것이라면, 관심이 없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문열이 묘하게도, 나의 이와 같은 비좁은 관심에 들어맞는 사람으로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말의 농이 있었다. 그리고 황태 덕장으로 만들어보려는 야심이 있었다. 대게의 사람들은 말에 농이 없고, 다만 지나가는 과객으로서의 황태 덕장이 있을 뿐이었다. 지나친 도식일지 모르겠지만, 황석영은 그의 한창 때나 나중 때를 합쳐서, 다만 바람 결에 흔들리는 황태 덕장의 피사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문열이 그를 조종하거나, 메달거나 하는 상대적이지만 절대적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 황태가 있다보니, 덕장 주인도 우리나라 밤하늘의 운명처럼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나는 덕장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유학에 관심이 있었다. 비평의 문법과 언급들이, 비교적 애매한 인용들일지라도, 영원을 약속할 만큼 파라퍼티가 에큐릿트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 소설들을 읽어보면, 그것의 직접적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프라파티가 에큐릿트한 비평의 세부들을 찾으려고 매우 노력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만 형식적인 것이다. 나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의 글들이 서울에서 가장 착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명제적 취급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내용에서 이렇게 막히니, 어쩔 수 없이, 비평적 프라파티가 에큐릿트한 것들을 독서했던 나의 모습에서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문법과 헌법과 비평의 조문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다 읽어야,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절에는 쓴 것들 모두가 내게는 자식 같았지만, 지금은 대표작들이 있고, 그것들조차 소상공인처럼 되는 것이 보인다 하겠다. 어쩌면, 지금 그리고 최근에 쓴 것들이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과거의 것들이 정말이지 청년이 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번호를 매긴 시들을 읽자니까, 마음이 한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는 무엇인가? 마음의 재산이 정확한 것이 시가 아닌가? 꼬불꼬불하고, 망연자실하고, 색깔이 불분명하여 예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관념 하나가, 전체를 후려치는 최루탄과 같은 등급의 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나라 것이 최고래서, 전 세계 시위대들이 내심 원망도 한다는 그것. 시는 문장을 만드는 것이고, 문장을 닦는 것이다. 불만이 분명한 것이고, 낭만시는 내 친구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것이다. 낭만시를 쓰려 해도, 헌법의 법조문 같은 사실주의가 늘 우리주위에 상존해 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낭만만 낭만만 낭만만 말할 수가 좀체 없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판단은 내가 정상에 있다는 오만하지 않는 오만으로 계속해서 자연을 이루어 나아가게끔 하였다. 작품은 소재라는 것. 소재가 이념이라면, 그것에는 단계만 있을 뿐이라는 것. 예술미 작품미 독창성 승부욕 같은 것은 모두 집단 주관적인 환상 같은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념적인 소재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어디에 속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어디를 답사 가야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니, 다시금 나는 주관에서 거울보기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의 순간적인 진행 같은 것. 노트북의 저장 같은 것. 여자 연예인을 좋아하고, 여자 연예인 이름이 나오는 것이 가장 그것의 징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얼마든지 쓸래면 쓸 수 있으나, 그때는 내가 경험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는 충분한 사실주의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면, 보편적인 것들이 다시금 튼실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이고, 등급 면에서 실존주의적인 표현들도 많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람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글을 잘 못썼는데, 고집을 피우고, 주관을 자랑하면서 죽지 않고 오다가 보니 마침내 마땅한 작품들이 나온 것이라고. 나는 그와 같은 우스개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고,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문학적 헌법이라는 장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의 실내와 조명,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음색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나로 인해서 발견이 된 것도 같다. 예를 들면, 나와 같이 똑똑하나, 문법이 좀더 세련되고, 말에 조금더 조심스럽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좀더 고급스러운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여간해서는 그것이 어렵지 않겠나 우리는 이제는 싶은 것이다. 똑똑하면, 공부나 하지. 공대 공부. 회충들이 시키면, 적당주의로 말을 거는 호전새끼들. 문법이 세련되면, 얼마나 세련되기까지 어려웠는데, 낭비나 모험을 감행하겠는가? 우리가 프랑스 철학을 안하는 것은 그나마 이명창들의 양심 때문일 것이다. 말에 조심스러움이 많은 사람은 소재 또한 조심스러움으로 점철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나와 같은 사람이 처음부터 가득했고, 죽을 때나 사라지는 것을 아는데, 우리의 말은 신기하게도, 우리와 상관 있는 것처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궁궐의 중심이고, 그때 소설들이 광화문 같은 것이었다면, 결과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답지만, 묘하게도 작은 나무문들이었다면, 사람들은 그 결과를 아는데도 나무문을 홀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결국에는 드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이 기승전결이 완벽해서 좋았다고 해도, 다만 그 정도의 미적 가치로 지금까지도 반복되어 대가댁은 커녕 남의 사당의 문지기 정도에나 그친다고 하다면, 다만 엔조이 관계로나 그치려고 하는 나쁜 마음도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기가 막힌 것은, 나의 궁궐로써는, 그들의 살 집들이 도리어 마련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인들과 문학인들도 사이가 좋다는 것을? 발견하는 이상한, 이 이상 좋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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