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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노래라고 하는 유창함의 진실 혹은 거짓.......

by 마음대로다 2014. 11. 21.

노래라고 하는 유창함의 진실 혹은 거짓.......

 

 

 

 

 

 

 

 

 

 

만일 광주에서 무슨 마음 아픈 일이 있어서 서울로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자동차와는 달리,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나는 그것을 설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연스러운 소음이 음악을 들을 만한 여유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이런 것이 생긴다. 스스로 흥얼거리는 것. 자동차라면, 당장에 라디오를 틀 것이고, 테이프를 돌릴 것이다. 그런데, 오토바이 여행자는 멈춰서 작은 라디오를 듣는 경우는 있겠으나, 영화 고속도로의 최재성처럼 달리다가 멈추고 핼멧을 벗고, 아주머니에게 말하고는 다라이에 받는 물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머리에도 붓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저절로, 우리의 뇌가 숱한 경험과 행복에의 욕구 때문에, 멜로디를, 멜로디도 예쁜 여인이고, 하모니도 예쁜 숙녀인데, 그 중에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음악은 삼대요소가 리듬 멜로디 하모니가 아니가 아니라, 멜로디, 멜로디, 멜로디이다. 그것의 김치적 최후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떤 팝송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막혀도, 전부를 기억하지 못해도, 가사는 눈꼽만큼 안다고 해도, 우리는 흐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한자어가 유창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한다. 그냥 말하는 것에도 유창이 있다. 우리는 그가 유창하게 말한다고 한다. 대신에 그게 뭔지는 포이그젬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은, 말이 유창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해서 올라선 약속과 같은 도성이다. 데이스타의 백미러로 팔십킬로의 도로를 질주할 때, 저녁에, 지혜를 발휘해서 교차로에서마다 선두에 서고, 넉넉하게 질주한다고 해도, 앞에서 차가 막히고, 뒤로 차가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는 오직 백미러로만 확인이 가능한다고 할 때, 우리는 분명 전체를 보지 못한다. 얼른 보아야 하고, 차의 진행 속도와 방향을 확인해야 하고, 맞은 편의 것도, 고개를 잠깐 움직여서 그것의 각도를 조금 벌려보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익숙해지면, 아무 것도 아니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다 그렇고 움직이는 것이다. 유창하다는 것은 그래서 벌판에 도로가 있느냐, 달릴 수 있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있느냐, 교통 법규와 체계가 있느냐, 잘 모르는 단어이지만 에스오씨가 있느냐 하는 것까지를 요청한다. 사람들은 실은, 영어건 한자건, 민자건, 한국 역사건, 기독교 교회 역사건, 출신 학교건 간에 유창한 것이 없다. 뭘 돌아볼 줄 모른다는 것이고, 돌아봐서 뭘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차선 변경 같은 것. 급차선변경 같은 것은 법에 접촉이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앞에 클러스터가 있고, 뒤쪽의 클러스터가 있고, 내가 지하차도를 이용해서 빨리 주행하다가, 다시금 교차로를 만난다 싶을 때, 좀더 바깥으로 주행하여 교차로 선두에 서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멱살잡이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서로가 서로에게 주행의 편안함을 주고, 속도를 줄일 때는 줄이다가 높일 때는 높이는 것을 용인하면서, 그러면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면 그 사람은 운전자가 아주 유창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비유는 거기까지이다. 소코마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데지그네이션이 만나야 하는 철학적 본질과는 사요나라한다. 어둠 속에서 리딩을 한다는 것. 그것의 숨가쁨. 그것의 철제적 현실. 도로를 계속해서 질주해야만 우리가 링거주사를 맞을 수 있다는 에스오씨적 현실. 그런 것들은 거의 한결 같이, 선배의 허리띠를 차는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실업가들이나 사업가들을 우상처럼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인문학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소품들까지 선용하고, 대품들은 승경에 이르도록 말의 질주를 하고, 사람들은 모르는 무지개로 갈무리를 하고, 대학 강의실이나 사회적 강의실에서 편안히 작은 의자에 앉는다고 하면, 사람들에게 사람이란 무엇이가에서 이찌방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나, 허구한 날, 허리띠가 끊어져라 차고, 허리띠가 끊어져라 먹기만 하고, 오직 먹는 것 다음의 송과선은 십년 째 익숙한 단어라고 하는 뇌와 발화적 사실에 아무런 부끄럼이 없다는 것을 두고 누군가 한국인이면서 할복을 하는 것 같은 환상이나 보는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은 질주하는 말 같고, 조선성리학적 거두 같은, 그와 같은 격물치지의 화성 같다. 다만 이런 식의 몰락과 추앙이라는 다람쥐 쳇바퀴가 이상과 현실의 전부라고 한다면, 또다시 경기도는 義王을 잃고 마는 것이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문학자가, 어째서 거의 전부의 사람이 그런 식의 단어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꿰뚫지 못하는가? 사업하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공허하게 질주하여, 숫자를 맞춰보는 사람이며, 다만 앞의 클러스터와 뒤의 클러스터를 두고, 횡으로 차선을 변경할 수 있는 재주의 사람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레파토리와 카테고리는 신이라는 관념의 사각형에 불과하다. 그것이 맞지 않으면, 멈춰 있다가 차선을 바꾸어 주행 중이던 뒷차를 쳐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째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불만이 어떠한 도형에서, 매질에서, 발생 촉발하여, 에스오씨 위에서, 운전의 유창함을 발휘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배우기에 바쁠 때는 유창함의 종류 중에, 그와 같은 사탄으로의 길이 숨겨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노래는 우리가 달리고 싶은 도로와 같다. 은빛으로 빛나면서, 한 오 분 가량, 기차나 버스의 창으로 비치는 오토바이 운전자는 하나님의 현신 같이만 보인다.

 

 

 

 

 

 

로봇과 기계는 그것의 경계에 있다. 노래까지도 경계에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쓸데없이 너무 많은 적을 갖게 된다........